
올해 4월 총선은 ‘운동권 정치’에 대한 평가가 판세를 결정할 전망이다. 운동권 세력은 20년 이상 한국 정치의 ‘특권층’으로 군림해왔다. 이들이 다시 유권자의 선택을 받느냐의 여부가 여야의 세력 구도는 물론이고 국가 미래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의 ‘전성시대’에는 중대한 모순과 착시 현상이 있다. 그중 하나는 일부 운동권 정치인들이 민주화운동의 과실을 독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는 사회주의나 김일성주의를 지향했으면서도 자신들의 노선을 민주화로 포장해 온 일이다. 가장 함축적인 사례가 1979년 10월16일에 일어난 부마항쟁이다.
당시 첫 시위가 이뤄진 부산대에는 부마항쟁의 발원지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앞면에 ‘민주주의 신새벽 여기서 시작하다’라고 쓰여 있다. 필체는 눈에 익숙한 신영복의 글씨다.
이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들은 황당하다. 신영복은 북한의 김일성 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한다는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다. 자유와 민주 회복을 내세웠던 부마항쟁과는 어떠한 연결성도 찾을 수 없다.
이 표지석은 부마항쟁 20주년을 맞아 1999년 세워진 것이다. 제막식 때 촬영된 기념사진이 이 부조화의 전말을 고스란히 전해 준다. 사진 속 인물 중에선 문재인 전 대통령(당시 변호사)과 송기인 신부가 눈에 들어온다. 표지석 글씨를 쓴 신영복은 문재인이 가장 존경한다는 사람이다. 다들 부마항쟁과 직접 관련이 없다. 다른 참석자들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정작 부마항쟁 때 시위를 이끈 사람들은 사진에서 찾아볼 수 없다.
모순은 이어진다. 표지석 위치가 첫 시위장소인 부산대 상대 건물 앞이 아니라 옛 도서관 앞에 있는 점도 이상하다. 표지석에는 시위의 불을 당긴 몇몇의 이름을 새겨 놓았을 법도 한데 그들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신영복의 이름만 적혀 있다.
제막식에 참석한 송기인 신부는 부마항쟁이 시작된 10월16일 낮에는 부산에 없었고 밤에 부산에 도착한 뒤 야간 시위와는 무관한 장소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가 2002년 김대중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을 때 공적 사항에는 ‘부마항쟁과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다’고 나와 있었다. 그는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때에는 미국에 있었다.
이처럼 엉뚱한 사람들이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들이 이 사업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다른 부마항쟁 기념사업이나 단체 역시 실제 헌신한 인사들은 소외된 채 부산 운동권의 단골 멤버들에게 결실이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청년·학생을 비롯해 넥타이부대까지 다수의 염원이 응축된 민주화의 ‘훈장’은 이런 식으로 일부의 전유물이 되어 갔다.
사회주의 운동이 민주화운동으로 포장이 바뀌는 일은 부마항쟁 직후인 1981년 일어난 부림 사건에서 나타난다. 영화 ‘변호인’에 나오는 바로 그 사건이다. 부마항쟁과 부림 사건의 관련 인물들은 비슷한 시기인 만큼 서로 연결돼 있다. 이 사건의 주요 인물로 이상록(작고)이 있다. 노무현 변호사는 “부림 사건에는 ‘사건’이 없다”며 ‘용공 조작’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상록의 진술은 다르다.
그는 1998년 ‘회고’라는 글에서 이렇게 술회한다. “검찰 취조 때까지만 해도 내가 사회주의자임을 부인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지은 죄를 생각해 보면(이 땅에서 사회주의 운동이라니!) 적어도 한 10년은 살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었다. 재판을 앞두고 바깥의 가족들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부인하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곧 따르기로 했다.” 이어 이상록은 자신이 사회주의 운동가임을 숨기자니 스스로 비참했다고 밝혔다. 다른 사람의 증언도 남아 있다. 이상록이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주장해 변호를 맡은 노무현을 난처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부림 사건은 ‘용공 조작’이었다는 게 정설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사건의 경중을 떠나 ‘사건’은 있었다. ‘조작’은 없는 걸 일부러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이후 사회주의나 주사파 운동권이 스스로를 민주화 세력으로 치장하는 일은 예사가 됐다.
부마항쟁은 한국 민주화의 물꼬를 튼 사건이다. 이는 열흘 뒤의 10.26과 이듬해 5·18 등 격동의 세월로 이어졌다. 만약 10.16이 없었다면 한국 현대사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산에서도 5·18은 알아도 10.16을 모르는 세대가 많다고 한다. 그마저도 일부 운동권의 탐욕을 위해 이용당하는 형편이다. 영화 ‘서울의 봄’은 그 시절을 담은 것인데도 10.16은 나오지도 않는다. 영화와 역사는 이처럼 다르다.
지난해 11월24일 부산에서는 10.16과 관련된 의미 있는 모임이 열렸다. 당시 시위를 주도한 인사들이 결성한 ‘10.16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의 발족식이었다. 44년 만의 출범이다. 이들은 ‘10.16은 자유를 꿈꾸는 인간들의 역사적 실천’이었다며 그동안 왜곡되고 저평가된 10.16을 제자리에 돌리는 사업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행사는 조촐했지만 큰 걸음의 일보(一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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