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26] 두려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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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1-15 06:30:45

아들의 속내는 치밀하지 못하나 성공적이었다. 홀로 된 어머니를 모셨다는 것과 어머니께 효자 아들이 된 것, 자기 아내가 착한 며느리임을 증명한 것이다. 그 와중에 행사하는 섹스는 일종의 의례이거나 아내를 위한, 약소한 배려였다. 남편은 까탈스러운 시어머니를 모시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승연에게 대학 타이틀은 단점이 아니다. 예쁜 부잣집 딸 승연과 결혼할 남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남편이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조건은 서울대뿐이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등록금이 싼 국립대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미래를 보장하는 자산은 학업 성적이었다. 자산을 여럿 확보한 어머니가 자부심을 느끼는 건 당연한 태도였고. 승연과의 결혼은 이문이 남는 거래였다. 결혼 시장에서 여자의 등급이 집안과 외모로 매겨진다는 걸 시어머니가 알았다면 승연에게 학벌 운운하며 자존심 긁지 않았을 텐데.

“수정이 좀 불러 봐.” 저녁 식사 준비를 끝낸 승연이 씻고 나온 남편에게 말했다. “나랑 살짝 다퉜는데 자는지 아직 화 안 풀렸는지 방에서 안 나오네.” “왜, 무슨 일이 있었는데 수정이랑 싸워.” 남편은 아내 승연을 사춘기 소녀 취급하며 수정의 방으로 걸어갔다.

“수정아 아빠 왔다. 밥 먹자.” 남편이 수정의 방문을 두드리려 하는데 수정이 제 방에서 나왔다. 수정은 주방으로 들어오더니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이 녀석, 아빠한테 인사 안 하네. 엄마랑 싸운 불똥이 아빠한테 튄 거야?” 남편이 괜히 서먹한 분위기를 바꿔 보려 말을 붙여 보지만 수정은 말할 기분이 아니다. “싸우긴 누가 싸웠대. 내가 엄마한테 확인할 게 있었던 거지.” 수정이 햄 반찬을 뒤적거리면서 말했다.

어려서부터 수정인 햄에 달걀 입힌 반찬을 좋아했다. 거의 매일 올라오는 반찬이지만 질려하지 않았다. 말문을 연 것 보니 수정이 엄마 말을 들은 게 틀림없었다. ‘그럼 그렇지. 누구 말을 믿어. 내 딸인데.’ 수정은 밥 한술을 떠 햄을 올리면서 남편에게 물었다.

“아빠, 엄마랑 처음 만난 게 언제야? 학교 졸업하고?” 승연이 국을 뜨다 말고 수정과 남편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불안했다. 남편이 승연 쪽을 보면서 대답했다.

“아빠 삼일회계법인 다닐 때 만났지. 그러니까, 졸업하고. 엄마 외국계 회사 다닐 때지. 엄마가 너무 예뻤어. 그건 갑자기 왜?” 수정은 이죽거리며 대꾸했다.

“아냐, 그냥 궁금했어. 대학 때 만났는지 대학 졸업 후에 만났는지. 내가 뭐, 엄마 예쁜 거 물어봤나. 근데 아빤 학교 다닐 때 데모 안 했어?” 승연은 가슴이 뛰었다. 결국 수정의 입에서 데모라는 단어가 나왔다. 수정이 승준 엄마한테 들은 희한한 말을 꺼낼까 두려웠다. 두렵다기보다 어떻게 변명해야 하나 걱정이 앞섰다. 승연은 어떻게든 대화 주제를 바꿔야 했다. 저녁 찬거리로 화제를 바꿔야 하나, 승연이가 가고 싶다던 아이돌 콘서트 이야기로 바꿔야 하나 망설이는 순간 남편이 입을 열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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