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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수의 新삼국사 산책
왜인의 경주 도성 침범사건 속으로
눌지왕이 남긴 불미스런 업보가 배경
정재수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9-21 09:55:09
 
▲ 정재수 역사 작가
    
자비왕은 즉위 이듬해인 서기 459년(자비2) 4월, 왜인으로부터 뜻밖의 공격을 받는다. 왜인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경주 도성을 범하며 왕성인 월성 궁궐까지 포위한다.
 
‘삼국사기’ 기록이다. ‘2년(459년) 여름4월, 왜인이 병선 1백여 척을 이끌고 동쪽 변경을 습격했다. 이어 월성을 포위하고 사방에서 화살과 돌을 비와 같이 퍼부었다. 왕성을 굳게 지키자 적들은 물러가려 했다. 이때 병사를 내어 공격해 쳐부수고 북쪽 바다 어귀까지 뒤쫓아 갔다. 적들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이가 과반이 넘었다(二年 夏四月 倭人以兵船百餘艘 襲東邊 進圍月城 四面矢石 如雨 王城守 賊將退 出兵擊敗之 追北至海口 賊溺死者 過半).’ 결과는 신라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신라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왜인이 자비왕을 잡기 위해 월성 궁궐까지 포위하고 공격한 걸까?
 
‘신라사초’ 기록의 설명
 
‘신라사초’는 사건 내용을 보다 상세히 전한다. <자비성왕기>이다. ‘2년(459년) 토시 기해 3월, 야인이 병선 100여척으로 동쪽 변경을 래습해 월성을 에워싸고 화살을 비오듯 쏘았다. 습보, 오함 등에게 관방을 고수하라 명하고 화살로 응전했다(二年 土豕 己亥 三月 野人以兵船百余艘 襲東邊來 圍月城 矢石如雨 命習宝烏含等 固守關防 以應矢戰).’
 
기록은 계속 이어진다. ‘4월 2일, 비태가 사벌군 8백명을 이끌고 입성해 야인을 크게 무찔렀다. 습보 등이 (월성)내에서 응대하며 공격하니 적은 야간에 달아났다. 북쪽으로 추격해 바다 어귀에 이르러 곧바로 선박에 올랐다. 수로장군 백흔 역시 병선을 이끌고 도착해 공격하니 적은 익사자가 과반수였다. 적의 선박과 병기를 빼앗고 반적(反賊) 소두(蘇豆)와 적추(賊酋) 안체(安彘)를 참해 그 목을 내다 걸었다. 비태 등 10명에게는 상을 내리고 패한 장수 5명은 벌했다. 백흔은 특별히 공과 죄를 물었다(四月二日 比太引沙伐軍八百入城 大破野人 習宝等自內應之 賊夜遁 追北至海口及登船 水路將軍白欣亦引兵船而至 賊溺死者過半 盡奪賊船及兵機 斬反賊蘇豆 及賊酋安彘示衆 賞比太等十人 罰敗軍者五人 白欣特以功績罪).’
 
먼저 ‘신라사초’의 야인(野人)은 ‘삼국사기’의 왜인(倭人)을 말한다. 왜인은 지금의 부산 동래 복천동고분 조성세력으로 미추왕과 함께 남하한 흉노(동호)계가 새로이 세운 임나(任那) 왕조다. 미추왕은 이들 왜인(임나) 세력을 이용해 당시 강력한 경쟁자인 석씨왕조 석우로(昔于老)를 제거했다. 왜(倭)를 야(野)로 이름을 바꾼 사람은 내물왕이다.
 
<내물대성신제기>이다. ‘6년(382년) 임오 2월, 왜와 화친해 호시(互市)를 열고 교혼(交婚)했는데 그 나라(國)를 야(野)라고 칭했다(六年 壬午 二月 與倭和親 互市交婚 稱其國曰野).’ 선비계인 내물왕은 이들 흉노(동호)계의 임나와 새로이 화친을 맺으며 야(野)로 명칭을 바꿔 불렀다.
 
다음은 등장인물이다. 신라측은 습보, 오함, 비태, 백흔 등이고, 야(왜)인측은 소두(蘇豆)와 안체(安彘)이다. 특히 기록은 소두와 안체를 각각 반적(反賊)과 적추(賊酋)로 표현했다. 반적은 신라를 배반한 역적이고, 적추는 적의 추장(酋長) 즉 해적집단의 두목이다. 소두와 안체는 야인을 이끈 수장이다. 또한 신라가 야인을 참살하며 대승을 거둔 북쪽 해구(海口)는 지금의 경북 포항 정도로 추정된다.
 
▲ 경주 월성 디지털 복원도 [사진=경상북도 제공]
  
눌지왕이 남긴 불미스런 업보
 
그렇다면 야인은 무슨 연유로 경주 도성을 침범하고 월성 궁궐을 포위한 걸까? 단서는 반적으로 규정된 소두(蘇豆)에서 찾을 수 있다. 사건은 16년 전인 서기 442년 눌지왕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눌지천왕기>이다. ‘22년(서기 442년) 수마 임오, 총덕(寵德)등이 야인의 땅에 깊숙이 쳐들어가 그 왕과 왕후, 왕자를 사로잡아 돌아왔다(二十二年 水馬 壬午 寵德等深入野地 虜其王后王子而還). 27년(443년) 흑양 계미 7월, 소상의(蘇相儀)가 왕의 딸 추씨(秋氏)를 낳았는데 소내(蘇乃) 야후(野后)이다. 왕이 별도로 궁을 세워 그녀를 총애하고 행하니 군신이 간쟁해도 듣지 않았다(二十七年 黑羊 癸未 七月 蘇相儀生王女秋氏 蘇乃野后也 王別立其宮而寵幸之 群臣爭之不聽).’
 
눌지왕은 442년 야국(임나)를 공격해 왕과 왕후 왕자 등 임나왕족을 사로잡아왔고, 이듬해인 443년 야왕의 왕후(野后)인 소상의(蘇相儀)를 범했다. 경주 도성을 침범한 소두는 바로 야후 소상의가 낳은 임나 왕자다. 당시는 모계 성씨를 따라 이름을 짓는 풍습이 있다. 아마도 소두는 눌지왕이 자신의 어머니를 범한 일에 분개해 신라를 탈출했을 것이고, 이후 안체가 이끄는 해적집단과 연합해 자비왕을 잡기 위해 경주 도성을 범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자비왕은 아버지 눌지왕이 남긴 불미스런 업보를 고스란히 물려받게 된 것이다.
 
특히 자비왕이 전투 결과를 두고 참여한 장수들에 대해 상벌을 내린 점이 눈에 띤다. 이들 대부분은 방계의 왕족이다. 기록에 나오는 습보(習宝)는 복호의 아들, 비태(比太)는 실성왕의 아들, 백흔(白欣)은 미사흔의 아들이다. 자비왕은 이들에게 상벌을 차등 있게 내림으로써 재위초기 자칫 흔들릴 수 있는 왕권을 확고히 구축했다. 다시 말해 자비왕은 왜인의 경주 도성 침범사건을 왕권 강화에 적극 활용한 것이다.
 
자비왕 재위초기 왜인의 경주 도성 침범사건은 눌지왕이 남긴 불미스런 업보가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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