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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수의 新삼국사 산책
장수왕의 남벌과 자비왕의 선택
나제동맹의 대의를 지킨 자비왕
정재수 필진페이지 + 입력 2022-10-10 11:14:04
 
▲ 정재수 역사 작가
 서기 474년 7월, 고구려 장수왕은 3만 군사를 이끌고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했다. 장수왕의 남벌(南伐) 전쟁이다. 이에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군이 수도 한성(풍납토성/몽촌토성)을 포위하자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급히 신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이때 신라에 급파된 사람이 상좌평 문주(文周)이다. ‘삼국사기’는 ‘문주가 신라에 파견돼 군사 1만을 얻어 돌아왔다(使文周求救於新羅得兵一萬廻)’고 적는다. 전후 상황에 대한 별도의 설명이 없어 우리의 상상만을 자극한다.
 
신라에 군사지원을 요청한 문주
 
문주는 백제 비유왕이 나제동맹 체결하면서 혼인한 눌지왕의 딸 주씨(周氏)가 서기 442년 낳은 아들이다. 문주의 몸속에는 신라왕실의 피가 흐른다.
 
신라에 급파된 문주의 상황이 ‘신라사초’에 나온다. <자비성왕기>이다. ‘7월 고구려왕 거련(장수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남하해 부여(백제)를 급히 공격했다. 부여왕 경사(개로왕)가 태자 문주를 보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며 말하길 “순망치한이오니 바라건대 대왕께서 살펴주소서”라 말했다. 왕이 신하와 조정에서 의논케 하니 기보가 말하길 “거련은 이리같은 마음을 가져 막기가 불가합니다”고 했다. 이에 비태에게 명하여 서북로군 1만을 이끌고 가서 구하라 했다(七月 麗主巨連引兵三萬南下攻扶余甚急 扶余君慶司使其太子文洲 請救於我曰 脣亡齒寒 願大王察之 王下其議于朝廷 期宝曰 巨連之狼心不可不制也 乃命比太引西北路軍一萬往救之).’ 문주는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고사를 인용하며 외삼촌 자비왕을 설득했고 자비왕은 군사 1만을 내어줬다.
   
▲ 고구려 남벌의 최전선 충북 청원 남성골산성 [사진=필자 제공]
      
하지만 신라군은 북상하지 못했다. 이미 고구려군이 파죽지세로 충남 북부지역(충북 청원 남성골산성)까지 밀고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라군은 일모성(충북 청주 양성산성)에 주둔하며 고구려군의 남진을 억제하는 수준에서 머물렀다.
 
그럼에도 고구려군이 남진을 계속하자 신라군과 백제군은 적극 방어에 나섰다. <자비성왕기>이다. ‘10월, 비태와 벌지가 고구려군을 감매 벌판에서 크게 쳐부쉈다. 해구와 연신도 하남에서 역시 고구려 병사를 쳐부쉈다(十月 比太伐智大破麗軍于甘買之原 解仇燕信亦破麗兵于河南).’
 
신라군(비태/벌지)은 감매에서, 백제군(해구/연신)은 하남(河南)에서 고구려군을 쳐부수며 승리했다. 감매(甘買)는 지금의 충남 천안 풍세이며, 하남은 충남 아산이다. 둘 다 곡교천(曲橋川) 남쪽이다. 곡교천은 아산 염치읍 곡교리 앞을 흘러 인주면 대음리에서 삽교천과 합류하는 하천으로 천안시 광덕면에서 발원해 풍세면에 이르는 구간은 ‘한천(漢川)’ 또는 ‘한내’라 부른다. 이로써 고구려군와 신라-백제 연합군은 곡교천을 사이에 두고 대치전선을 형성했다.
 
나제동맹의 대의를 지킨 자비왕
 
해가 바뀌어 475년에 전개된 상황이다. ‘고구려사략’ <장수대제기>이다. ‘장수43년(서기 475년) 을묘 정월, 자비가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해 명활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5월, 상이 천조(天朝·고구려)를 거역한 자비에게 노해 정벌하려다 황(晃)태자가 간해 그만뒀다. 6월, 풍옥(風玉)태자를 자비에게 보내 백제 땅을 나누는 것을 의논케 하니 자비가 딸 둘을 태자에게 바쳐 시침(侍枕·시중)을 들게 하였다. 태자가 자비에게 조서를 봉행하지 않아 책망해도 자비는 오락가락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遣風玉太子于慈悲 議分濟地 慈悲以其女二人獻于太子侍枕 太子以慈悲不奉詔責之 慈悲疑貮不斷). 10월, 자비가 웅진(충남 공주)땅을 문주에게 주어 남은 무리를 수습케 했다.’
 
▲ 장수왕의 남벌전쟁과 삼국의 대치전선. [사진=필자 제공]
   
장수왕은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백제를 지원하고 있는 자비왕을 문책하며 압박 강도를 높인다. 특히 6월 기록은 우리의 눈을 의심케 한다. 장수왕이 자비왕에게 백제 땅을 나눠 갖자는 ‘분집(分執)’을 제안한다. 그럼에도 자비왕은 자신의 두 딸을 희생해가며 나제동맹의 대의를 지킨다. 이 대목에서 ‘신라사초’ <자비성왕기>는 7월에 백제 곤지(昆支)가 입조한 사실을 적고 있다(七月 文洲弟 昆支 來朝).
 
비유왕의 아들인 곤지는 461년 형 개로왕에 의해 정치적 숙청을 당해 왜(야마토)로 건너가 체류했다가 474년 장수왕이 남벌을 단행하자 급히 야마토군을 이끌고 귀국했다. 이때 자비왕의 주선으로 곤지(백제)와 풍옥(고구려)은 정전협상을 벌여 전쟁을 마무리 했다. 고구려군이 물러간 10월, 문주는 신라 지원에 힘입어 웅진에 새로운 도읍을 정하고 즉위한다. 백제 웅진시대의 개막이다.
 
장수왕의 남벌에는 나제동맹의 대의를 지켜 백제 멸망을 막아낸 자비왕의 선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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