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 여행을 앞둔 사람의 기분으로 산다면 어떨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한 사람은 다음 주 초에 스위스 여행 계획이 서 있고, 다른 사람은 여행 간 동료의 일까지 떠맡아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문법으로 보면 당연히 전자의 행복지수가 월등하다. 그것도 지금 당장! 우리는 이럴 때 여행 일정이 잡힌 사람에게 “마음은 이미 스위스 몽블랑에 올라가 있을 걸!” 하며 부러워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두 사람은 ‘지금’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 놓여 있다. 다음 주 초가 되려면 닷새나 남아 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은 벌써 행복하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현상을 당연히 여긴다. 마치 보장된 행복과 보장된 불행이 동시에 있다는 듯이. 물론 두 사람이 그렇게 믿는다면 말릴 수 없다. 마음의 일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닷새 후의 행복을 오늘로 앞당겼고 그 동료는 닷새 후 ‘할 일’을 앞당겨 끌어안고 스스로에게 ‘불행’이라는 라벨을 붙인 셈이다.
나는 ‘행복’과 ‘불행’이라는 표현에 불만이 많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두 개 언어는 우리 사회에서 ‘없었던 어휘’로 사장시키고 싶다. 두 단어에 묻어 있는 사람들의 해석이 오히려 불행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체감하는 ‘행복’은 최소한 ‘한·일전 축구 시합에서 한 골 넣는 순간의 기분’ 정도가 돼야 겨우 그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부지불식간에 ‘행복’은 그만큼 희귀하고 떡 벌어지게 차려진 잔칫상 같은 어휘가 되고 말았다.
행복은 원하는 일을 지금 실감하고 있는 심리 상태다
만약 ‘행복’이라는 표현을 우리의 일상에서 쫓아낸다면 무슨 말로 대체할 수 있을까. 조준호 교수(고려대)는 ‘불교의 선정 단계’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즐거움’을 ‘행복’의 대체 용어로 쓴다. 행복은 ‘시합 끝나기 1분 전의 결승골처럼 짜릿하고 통쾌한’ 심리적 폭발이 아니다. 그에 의하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즐거운 상태’라면 ‘나는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탁구를 치면서 어쩌다 내가 한 점을 딴 순간의 기분, 있잖은가. 정말? 행복이 이렇게 가까워도 돼? 행복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 또한 ‘행복’을 ‘즐거움·안락·평온·희망·안온·황홀·몰입’과 같은 심리 상태라고 풀이한다. 이 중에서 하나만 걸리면 당신은 세계적인 석학이 인정하는 ‘행복 상태’인 것이다.
우리 사회가 ‘불행 양산 사회’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건 불행한 사태, 불행한 뒤끝이 불행한 해결을 재생산하는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이와 같은 ‘행복 신비주의’가 불행감을 양산하는 측면도 있다.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행복감을 스쳐 간 고래처럼 다시 만나기 어려운 마음 상태로 치부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쩌면 당신의 행복은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행복을 엿보면서, 타인의 행복을 셈하면서, 타인의 행복과 나의 불행을 대조하면서, 자존감 팍팍 밟으며 성장한 내면의 괴물일지도 모른다.
임낭연(경성대)·권가영(경성대)·신지은(전남대) 교수가 쓴 논문 ‘양육과 행복의 관계 : 경험표집 연구’는 논문 성과와 함께 행복의 의외성을 시사해 주는 점이 눈길을 끈다. 특히 이 논문은 ‘3세 미만의 양육 엄마’가 경험하는 긍정과 부정 정서 중 긍정 정서 경험이 높게 나와서 사회 일반의 ‘출산·양육에 대한 부정적 우려’를 교정해 주고 있다. 이 논문에 나타난 3세 이하 자녀 어머니들의 주요 감정을 보면 ‘사랑·만족감·편안함·감사·기쁨·성취감·재미·신남·자부심’ 등이다. 저 표현 어느 하나에서 ‘행복’이 아니라고 할 만한 언어가 있는가.
중요한 것은 늘 ‘지금’이다. 그 누구도 당신에게 내일을 보장해 준 적이 없다. 닷새 후의 몽블랑?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알 수 없음을 알면서 ‘즐겁다’면 당신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더군다나 여행 아닌가. 모든 사람은 ‘물질적 소유보다 순수 체험’에 더 마음이 쏠린다. 그래서 알바하여 여행가는 순서는 자연스럽다.
그런데 닷새 후 몽블랑을 기대하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 그가 당신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만약 지금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그러니, 당장 즐겁기로 작정한다면 ‘행복’과 ‘지혜’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 당신도 여행 계획을 짜는 것이다. 다만 닷새 후가 아니라 6개월 후, 아니면 1년 후라도 좋다. 로마에 가고 싶으면 로마의 정보를 찾아보고, 스웨덴에 가고 싶으면 그에 관한 정보를 찾아본다. 꼭 여행이 아니라도 좋다.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 그 즐거움을 지금 실감할 수 있으면 그 일이 성사되고 안 되고의 문제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행복하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