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19] 시작, 지금, 여기,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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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엔 근시, 노년엔 원시인 이유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6-27 06:30:10

“무슨 상관이에요. 중요한 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새로 시작하고 있다는 거예요.”

하운이 걸음을 멈추고 나와 마주 섰다.

“결과는 잊으세요. 태풍조차 당신을 침몰시킬 수 없어요. 당신을 굴복시킬 수 있는 건 오직 당신의 절망뿐이에요.”

하운에게선 개인적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재단의 일원으로 나를 염려하는 말이었지만 나는 조금 전 그녀가 말한 ‘시작, 지금, 여기, 우리’라는 단어들에 사로잡혔다. 주결의 말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알지 못한 채 마음이 끌리는 매혹과는 다른 하운이라는 바다, 그 아래 감추어져 있던 풍경에 대한 애틋함이 내 마음에서 싹트고 있었다.

“네, 유 변호사님.”

그때 하운이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의 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는 그녀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그랬군요. 많이 놀라셨을 거예요.”

상대의 이야기를 듣던 하운의 표정은 자못 심각해졌지만 내게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먼저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지금 말이에요? 아. 그렇게 서두르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뒤돌아서서 통화를 계속하던 하운이 뜻밖이라는 듯, 목소리의 톤이 조금 높아졌다.

“그럼 언제 도착하시는 거예요?”

누굴까 궁금했지만 나는 하운을 바닷가에 남겨 두고 별장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다 뒤돌아본 바다는 황금빛 햇살을 반사시키며 일렁이고 있었다. 붉게 퍼지던 일출의 빛은 점점 높고, 희고,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수평선에서부터 희미하게 번지기 시작하는 두꺼운 회색 구름층을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닷가에 내려가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구먼.”

최 박사는 자작나무 숲으로 잠깐 산책을 다녀왔다며 샐러드와 프렌치토스트로 아침을 차리는 중이었다. 나는 그를 도와 커피를 내렸다.

“나이가 들면 바다든 산이든, 어디에도 뛰어들 수가 없거든.”

주결이 말했다.

“인생도 그래. 젊은 날엔 첨벙 뛰어들지. 가까이 다가가서 낱낱이 보고 싶으니까. 그래서 근시인 거야. 하지만 노년에는 원시가 되지. 거리를 두어야 전체를 조망할 수 있거든.”

주결이 창 너머 수평선을 그리운 듯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엔 한때 헤엄쳐서 세상을 가로지를 수 있으리라 믿고 두려움 없이 뛰어들었을 바다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밖에.”

그때 하운이 생각 많은 얼굴을 하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간단히 아침 식사가 끝날 때까지 입을 다문 채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하운이 내게 말했다.

“무훤 씨가 먼저 올라가세요.”

그녀는 나와 함께 서울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했다. 하운은 최 박사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었다. 시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 보자는 제안을 처음엔 거절했지만 최 박사는 끝내 하운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하운과 함께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 아쉽긴 했지만 주결이 불안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오전 진료만 할 테니 서두르자고 하운이 주결을 일으켜 세웠다. 나도 2층으로 올라가 급히 짐을 챙겼다. 해월영을 나서기 전 에바의 노트는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누구보다 그녀에 대해 궁금한 건 주결일 터였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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