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의 만사만감(萬事萬感)] 꽃을 지워야 씨앗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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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8-29 06:31:10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 ‘꽃’이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다. 장윤정이 부른 트롯 가요 ‘꽃’도 있다. 발랄한 리듬과 경쾌한 노랫말로 꽤 좋아하는 노래이다. 식물이 온 힘을 쥐어짜 터뜨리는 꽃은 인간에게도 존재한다. 영혼을 다해 자신을 발화하는 행위 속에서 나는 ‘무엇’이 된다. 그 ‘무엇’을 알아본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러 줄 때 우리는 서로에게 ‘꽃’이 된다. 그렇게 서로의 빛깔과 향기를 감지하고 관계를 맺고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식물은 왜 꽃을 피우는가. 씨앗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러려면 수분과 수정이 일어나야 하므로 도와줄 곤충·동물과 인간이 좋아하는 선물을 잔뜩 만들어 쟁인다. 그런데 어떤 꽃은 피기도 전에 비바람에 사그라들기도 하고 어떤 꽃은 꺾이기도 한다. 수분에 성공하여 열매와 씨앗을 만들었는데 다 익기 전에 먹히거나 땅에 구르기도 한다.

나의 이름을 ‘꽃’으로 불러 준 관계도 그렇다. 처음에 영혼의 짝을 만난 듯 반갑다가 스르르 멀어지기도 하고 먼 듯 가까운 듯 지내다 보니 알찬 씨앗이 영글기도 한다. 스치는 인연, 머물다 사라지는 인연, 배울 것이 있어 만나는 인연, 지지고 볶으며 꾸역꾸역 길어지는 인연, 서로 할퀴며 상처내는 인연 등 다양한 모습이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동료도 모두 다 ‘꽃’의 관계이다. ‘시절 인연’이란 말도 있다.

요즘 나의 명상 과제는 ‘인연 버리기’이다. 관계를 다 끊고 세상 속에 고립된다는 뜻은 아니고 지나온 관계를 되짚으며 함께 피웠던 ‘꽃’을 하나하나 지우는 것이다. 아름다웠든 슬펐든 간에 나의 정원에 핀 꽃은 죄다 없애는 작업이다. 부모·형제·자녀·배우자·친척·친구·동료·상사·후배·제자 등등 살면서 심고 가꾸었던 꽃들을 다 정리한다.

이유는 명료하다. 씨앗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꽃이 다 제각각이듯 씨앗도 그렇다. 그 순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었던 그들은 씨앗과 열매라는 자연의 필연 앞에 잊혀 간다. 누구는 내게 아픔을 알려 주었고 누구는 행복과 즐거움을 가르쳤다. 누구는 분노를, 누구는 사랑을 일깨웠다. 서로에게 꽃이었던 관계는 어떤 종류였든지 다 소중하다. 의미가 있다. 하지만 꽃이 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꽃은 자신의 소임을 다했고 살뜰한 열매를 만들어 서로에게 선사했다.

식물은 여러 생을 반복하면서 꽃을 피우고 잎을 내고 열매를 만들어 씨앗을 키운다. 식물이 꽃을 지우면서 이별의 눈물을 흘릴까. 애지중지 만든 열매와 씨앗을 내놓지 않겠다고 발버둥칠까. 식물은 삶의 고수라서 그런 바보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철 따라 찾아드는 인연에게 아름다운 ‘꽃’의 타이틀을 주고 그들을 가꾸고 사랑하며 살 수 있다. 우리도 식물처럼 할 수 있다. 때가 되어 지는 꽃을 떠나보내며 그가 준 열매와 씨앗을 보듬을 수 있다. 그렇게 식물처럼 살 수 있다. 씨앗이 나를 떠나 또 하나의 ‘꽃’을 준비할 때 박수를 보내며 응원할 수 있다.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만 나는 다음 번 꽃을 피울 수 있다. 도대체 마냥 식물을 부러워할 필요가 있는가.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났지만 자연을 활용하여 별별 문명과 도구를 만들었다.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서 신의 영역에 도전해 보기도 한다. 인간은 마음과 의식에서 시작해 행위를 통해 식물로 산다. 평생 피우는 꽃이야 많을수록 좋다. 씨앗도 풍성해서 나쁠 것이 있는가!

식물처럼 살려고 죽은 후 다음 생을 기약할 필요도 없다. ‘지금’ 이번 생을 여러 번 살면 된다. 제각기 좋아하는 꽃으로 살면 된다. 맨드라미도 되었다가 안개꽃도 되었다가 튤립 구근이 되어도 좋다. 봉숭아 꽃씨인 줄 알고 심었는데 삼색제비꽃이 피었다고 당황할 이유가 없다. 7년을 땅 속에서 기다리다가 엄청난 크기의 꽃을 이틀간 피우는 타이탄아룸도 있고 바다와 땅을 자유롭게 오가며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맹그로브도 있다. 때맞춰 꽃을 피우고 적시에 꽃을 지우면 알토란 씨앗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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