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路 동서고금 <28> 히로뽕과 국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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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신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0-25 06:30:30

‘국뽕’이 ‘나라 국(國)’ ‘히로뽕’을 조합한 신조어임은 다들 알 것이다. 거기서 한걸음 더 들어가 보자. 1941년 다이닛폰(大日本)제약사가 알약 형태의 피로 방지·활력제 ‘필로폰’(Philopon·ヒロポン)을 내놨다. 그리스어 ‘일 사랑’ ‘부지런하다’에서 온 상품명 필로폰엔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환상이 담겼다. 조만간 전시 총동원 체제로 달려갈 시대다운 작명이다.

필로폰은 philo+opus를 살짝 매만진, 일종의 일본제 그리스어다. 철학이라고 번역된 ‘필로소피(앎에 대한 사랑)’와 구조가 동일하다. 졸음·피로감을 막아 준다 해서 발매 초기엔 ‘초인의 약’으로 통한 필로폰이지만 부작용이 알려지면서 1951년 공식 금지됐다. ‘히로뽕’이란 발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한때 마약의 대명사였다.

필로폰이 영어권에선 메스암페타민(메틸암페타민), 줄임말 ‘메스(meth)’나 흰 결정체 모습에 빗댄 ‘크리스탈’ 등의 은어로 지칭된다. 일본 정부가 필로폰을 불법화한 후에도 암흑가를 중심으로 제조·유통됐으며, 그 영향이 우리나라 일부 연예인들에까지 미쳐 매스컴을 타곤 했다.

일본인들도 Philopon의 Phi를 정확한 フィ[fɪ]로 발음할 수 있다. 우리말에선 퇴화한 순경음(脣輕音)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주요 정보통신 기업 ‘후지쯔’(富士通)의 로마자 표기는 Hujitsu가 아니라 Fujitsu다. 다만 フィロポン 대신 ヒロポン이 된 것은 상품명의 간결성을 추구한 결과로 보인다.

Philopon의 pon 부분이 특히 흥미롭다. [ㅃ]와 [ㅍ]를 일본인은 동일한 발음으로 듣는다. 또 ‘스미마셍’(미안합니다)의 ‘셍’ 역시 ‘센’과 ‘셍’ 사이 어중간한 비음이듯, 받침소리 ㄴ과 ㅇ도 일본어 표기에선 구분이 안 된다. 따라서 ヒロポン의 한글 표기는 ‘히로폰’ ‘히로뽄’ ‘히로퐁’ ‘히로뽕’ 모두 가능하다. 히로뽕이 채택된 것은 마약에 취한 느낌을 재현한 기묘한 어감이 한몫한 것 아닐까 싶다.

히로뽕은 아예 은어풍의 줄임말 ‘뽕’으로 정착됐고 근년 ‘국뽕’ ‘뽕이 차오르다’ 등의 표현이 등장했다. 제어 불가능한 비논리성·맹목성을 인정한 농담조 단어였으나 사용 빈도와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인류사상 국뽕의 가장 극단적 사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일 것이다. 일본 역사 최강·최악의 국뽕 시대에 신체를 과도하게 각성시키는 히로뽕이 태어난 것도 우연일 수 없다.

오늘날 가장 두드러진 국뽕의 총화는 중국이다. 국력이 아직 부족할 뿐 중국과 비슷한 국뽕 추세인 인도의 경우도 주목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국뽕이 국사학계를 시발점으로 한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지난 수십 년 그들의 연구는 대체로 과거사 미화를 통해 대한민국을 폄하하는 쪽으로 귀결되는 경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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