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에서 제일 청정한 물을 보급하는 제주도가 수천 년간 물 부족 섬이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제주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돌하르방처럼 우리는 또 하나의 돌 조각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여인이 지게에 물허벅(물항아리)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에는 참 애달픈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수천 년간 물 부족에 시달리는 제주도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물허벅을 메고 몇 킬로의 길을 걸어 물을 길어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집에 남아 물을 기다렸습니다. 깨끗한 물 한 모금은 소중했고, 가축에게 줄 물을 확보하기 위해 온 가족이 고된 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물이 없으면 논밭을 가꿀 수도 없었고, 마실 물조차 부족했습니다. 화산암 지형은 빗물을 땅속 깊이 흡수해 버렸고, 지표에 머무르는 물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풍부한 강수량에도 제주도는 물 없는 섬이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주민의 삶은 고단했습니다. 제주도는 가구평균소득이 전국 평균 소득의 6분의 1에 불과한 낙후된 섬이었고, 화산암 지형 탓에 물이 늘 부족했습니다.
“물 없으면 살암시나 없지게(물이 없으면 삶도 없지).” 한 어르신이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비가 와도 물은 흘러 다 버리주, 우린 물 따라 댕겨야 한다게…(비가 내려도 물은 흘러가 버리고, 우리는 물을 따라다녀야 한다).” 제주도에서 물이란 삶의 조건이었습니다. 물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농사는 고사하고 깨끗한 물로 아이를 씻기는 것조차 꿈이었습니다.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 시·도를 순회하며 각 지역 주민의 고통과 현실을 직접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제주도는 그의 첫 방문지 중 하나였습니다. 한라산의 아름다움과 바다의 푸르름이 어우러진 섬은 멀리서 보면 평화롭고 풍요로워 보였지만 가까이서 본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박정희 의장이 본 제주도는 척박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 섬은 왜 이렇게 물이 부족한가?” 그는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며 물이 부족한 상황을 자세히 들었습니다. “물을 길러 몇 시간을 가야 한다고요? 이곳에서는 농사를 짓기 힘들겠군요.” 그는 이 물 없는 섬의 고통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물이 없으면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는 건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1943년에 만들어진 비포장 도로로 꼬불꼬불했던 임도를 확장·정비해 5.16도로를 개통했습니다. 5시간이나 되던 통행시간이 1시간 반으로 줄어든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후 1970년대까지 제주도 전역의 도로를 완성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주도 도로망 확충을 통해 단순한 교통 인프라 구축을 넘어, 지역발전과 국가균형발전을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개발 정책은 제주도의 낙후된 교통망을 혁신적으로 개선하고, 제주를 대한민국의 중요한 경제·관광 지역으로 도약시키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제주도의 교통망은 박정희정부가 추진한 도로 건설 사업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으며, 이는 제주 현대화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도로 공사 중 박정희 대통령은 한라산 중산간 지역을 직접 걸으며 주민이 겪는 물 부족의 고통을 다시 한번 체감했습니다. 가뭄으로 말라 버린 논과, 용천수를 찾아 발길을 옮기는 주민들의 모습을 본 그는 굳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 섬에 물을 가둬야 한다. 물이 없으면 이 섬은 앞으로도 희망이 없다.” 그는 관계자들에게 어승생저수지 건설을 지시했습니다. 제주시 해안동에 대규모 저수지를 만들어 중산간 지역에 물을 공급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저수지가 완공되면 제주도는 더 이상 물로 인해 고통받지 않을 것이다.”
1967년 어승생저수지 공사가 시작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저수지 스케치를 하며 공사 관계자들을 독려했습니다. 주민들은 “이제 우리도 맑은 물 써 볼 수 있나게(이제는 우리도 깨끗한 물을 쓸 수 있게 되는 건가)”라며 기대감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공사가 진행되면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제주도의 화산암 지형은 다공질로 이루어져 있어 물을 가두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1970년, 3년간의 공사 결과 저수지에 물을 채운 첫날, 하루에 5000t의 물이 빠져나가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댐 바닥에 생긴 구멍과 암반층의 함몰은 기술자들에게 좌절감을 안겼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 물은 제주도민의 생명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첫 번째 보강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6000t의 물이 새어 나가는 두 번째 누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기술자들은 고개를 숙였고, 공사 관계자들은 공사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서울대와 동경대학교의 지질학 전문가들을 초빙해 자문을 받으며 끝까지 댐 공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술진들에게 추가 예산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해결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공사를 중단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1971년, 건설부는 새로운 해결책을 제안했습니다. 저수지 바닥을 암반층까지 3m 더 깊게 파내고, PVC 코팅 비닐과 철근 콘크리트를 덧대어 누수를 막는 방법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기술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사가 완료될 때까지 제주도를 두 차례나 더 방문하며 직접 진행 상황을 살폈습니다. “제주도민이 더 이상 물로 고통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번에는 완벽하게 만들도록 하라.”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숫자인 10억 원 이상을 댐공사에 추가 투입해 1971년 12월 드디어 어승생저수지가 완공되었습니다.
완공식 날, 제주도 주민들은 처음으로 저수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보았습니다. “물이 흐른다!” “이제 물 땜시 고생 안 해도 되는 건가게?(이제 물 때문에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어르신들은 물을 두 손으로 떠 마시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 어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이젠 니네는 물허벅 지고 다닐 일 없주게(이제 너희들은 물허벅을 지지 않아도 된다).” 어승생저수지의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민들에게 희망이었고, 생명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완공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삶을 바꿀 희망입니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고, 아이들에게 깨끗한 물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어승생저수지의 완공은 제주도의 물 부족 문제를 사실상 해결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주도의 도로를 확충하고 관광 인프라를 개선하여 제주도를 대한민국의 대표 관광지로 발전시키는 데 힘썼습니다. 새로운 도로가 건설되고, 공항과 항만이 확장되면서 제주도는 더 이상 고립된 섬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제주도는 청정 물의 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다수와 같은 세계적인 생수 브랜드가 탄생한 것도, 이 모든 변화의 연장선입니다. 물이 없던 섬은 이제 물을 자랑하는 섬이 되었습니다. 어승생저수지에서 시작된 이 여정은 단순한 개발을 넘어 제주도민의 삶을 바꾸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히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제주도를 14번 이상 방문하며 보여 준 끈질긴 노력과 결단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철학은 단순했습니다. “국민이 고통받는다면 해결책을 찾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그의 결단과 실행력은 제주도를 변화시켰고, 제주도민에게 희망을 선물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태도를 보여 준 사례는 어승생저수지뿐만이 아닙니다. 박정희 시대를 돌아보면, 대한민국의 여러 지역과 분야에서 그의 결단력과 실행력이 빛났던 순간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단순히 경제적 성장을 넘어 국민의 삶의 질을 변화시키고 희망을 심어 주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했던 열정과 헌신은 한 지도자가 국민의 삶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과거를 배우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제주도의 변화는 단지 지역적인 성공이 아니라, 희망과 의지가 만날 때 어떤 기적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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