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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랭이꽃의 한자 이름은 석죽화(石竹花)다. ‘바위에 자라는 대나무꽃’이라는 뜻인데 이 이름은 다음과 같은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옛날에 힘센 장사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돌 악령을 퇴치하고자 산에 올라가 그 돌을 향해 활을 쏘았다. 그런데 얼마나 힘껏 활시위를 당겼는지 대나무로 된 화살이 바위 깊숙이 박혀 빠지지 않았다. 그 후 그 돌에서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는 꽃이 피어났는데 사람들은 이를 석죽화라 불렀다고 한다.
패랭이꽃은 옛날에 서민들이 쓰던 모자 패랭이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름만으로도 소박하다는 느낌이 드는 패랭이꽃은 낮은 지대의 건조한 곳이나 모래땅·바위 틈 같이 메마르고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한번 싹을 틔우면 10년 넘게 살면서 예쁜 꽃을 피우고 그 꽃과 열매를 그늘에서 말려두면 약재로도 쓸모가 있다.
패랭이꽃 덕분에 요직을 차지한 정습명
고려 때 문신 정습명은 젊은 시절, 패랭이꽃의 이런 소박함에 자신을 비유하여 시를 썼다. 이 시에서는 세간의 눈길을 끌고 사랑받는 모란꽃을 패랭이꽃과 대조하였는데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알아주는 이 없어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내용으로도 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모란의 붉음을 좋아하여/ 뜰 안에 가득 가꾸고 있구나/ 누가 알랴, 거친 초야에도/ 예쁘게 피고 있는 꽃을/ 그 빛은 시골 연못 속 달에 어리고/ 그 향기는 바람 언덕 나무로 흩어진다/ 궁벽한 시골이라 부귀한 이 적어서/ 늙은 농부만 그 아름다움을 즐기노라
그런데 당시 고려 왕이던 예종은 이 시 음송을 듣고 감동하여 정습명을 홍문관 관리로 뽑았다고 한다. 정습명은 패랭이꽃 덕분에 요직을 차지한 셈이다. 예종 뒤를 이은 인종은 왕에게도 용감하게 직언하는 정습명의 기개를 높이 평가했고 모든 일은 정습명의 말을 따르라고 세자에게 유언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된 세자(의종)는 간신 무리에 에워싸여 정습명 같은 충언자를 멀리했다. 그래도 왕의 잘못에 거침없이 간언했던 정습명은 급기야 의종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정습명은 다른 대신들의 무고에 시달리고 관직을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충신의 쓴소리에 귀를 닫은 의종은 이후 무신정변으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무신들의 오래된 불만이 폭발한 무신정변
무신정변은 고려 사회에서 차별받던 무신들이 일으킨 사건이다. 고려는 초기부터 건국을 이끈 무신들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문신 중심의 정치를 펼쳤다. 외적을 물리치거나 내란을 평정한 지휘관으로 유명한 서희·강감찬·윤관·김부식 등도 모두 문신이었다. 무신정변은 느닷없는 사건이 아니라 소외와 무시를 당하며 쌓여온 무신들 불만의 폭발이라 볼 수 있다.
의종은 궁궐 밖으로 자주 행차하여 문신들과 연회를 즐겼는데 이때 상장군 등 지위가 높은 무신도 호위병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신정변 거사 당일에는 임금이 보는 앞에서 결정적 사건이 벌어졌다. 문신들과 술 마시던 의종은 무신들을 불러내 오병수박희라는, 맨손으로 대결하는 무술 시범을 시켰다. 그런데 원로 대장군 이소응이 시합 중 힘에 부쳐 포기하려 하자 문신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때려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그 모습을 본 의종과 문신들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고 일부는 야유도 퍼부었다. 그 자리에 있던 정중부는 “이소응이 3품 벼슬의 고관인데 어찌 이렇게 심하게 모욕을 주느냐”며 한뢰를 꾸짖었다. 정중부도 문신에게 수모와 모욕을 당한 적이 있었다. 김부식의 아들인 내시 김돈중이 왕의 호위를 맡은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그을린 것이다.
그날 저녁, 정중부 등 무신들은 “문신의 관(冠)을 쓴 자는 관직이 낮더라도 씨를 남기지 못하게 하라”고 외치며 문신과 환관 등을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이날의 상황에 대해 ‘고려사절요’에는 “그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죽이란 이름이 분수에 넘치는구나”
정권은 잡았지만 무신들은 그야말로 ‘피가 튀는’ 권력 투쟁을 계속했다. 정변 주도 인물 중 하나인 이고는 이의방에게·이의방은 정중부에게·정중부는 경대승에게 죽임을 당했다. 경대승은 요절했고 횡포를 일삼던 이의민은 최충헌에게 피살되었다. 이후 4대 62년에 걸쳐 최씨 세습 정권이 이어졌고 임유무를 마지막으로 무신 시대는 100년 만에 막을 내렸다.
무신 정권이 한창일 때 ‘동국이상국집’ ‘동문선’ 등 여러 권의 작품집을 남긴 이규보도 패랭이꽃에 대해 시를 썼다.
절조는 대나무처럼 고고한데/ 꽃이 피면 아녀자들처럼 곱기도 하다/ 가을을 못 이겨 떨어져버리니‘/ 석죽이란 이름이 분수에 넘치는구나
뛰어난 문필가이지만 최씨 정권에 기대 입신 출세와 자기 몸 지키는 데만 몰두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규보를 정습명처럼 패랭이꽃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은 아닐까? 이름은 얻었으나 절조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니 그 이름이 분수에 넘친다는 의미의 구절, 그 구절이 심상치 않아서 드는 생각이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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