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27] 선택, 운명의 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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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1-16 06:30:16

“나는 데모할 여유가 없었어. 4년 내내 공부만 했지. 회계사 자격증 따야 하고 외시·행시 준비도 했으니까. 졸업 후에 먹고살 걱정만 했어. 아빠 같은 사람에겐 국가가 있고 개인이 있는 게 아니라 개인이 있어야 국가가 존재하는 거였거든. 데모도 먹고살 만하니까 하는 거란다. 원래 등 따시고 배 부르면 딴 생각해. 배고파 봐. 먹고사는 게 우선이라 아무것도 안 보여. 근데 아빠가 데모했는지 안 했는지 내 딸이 왜 궁금할까.”

수정은 승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냥. 그냥 궁금했어. 데모는 어떤 사람들이 했는지.”

수정이 끝내 승연과 한마디 안 했다는 건 엄마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하다는 의미였다. 수정의 입을 통해서 승준 엄마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 수정의 입에서 어떤 얘기도 나와서는 안 됐다. 목이 타들어 갔다.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았는데 승연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오물거리며 밥을 먹고 있는 수정의 입을 보니 더욱 목이 말랐다. 냉장고를 열어 어제 끓여 넣은 보리차를 꺼내 입에 대고 마셨다. 아냐, 보리차가 아냐. 목이 탄단 말이야, 활활 타오르는 목구멍을 적셔 줄 것은 보리차가 아니야. 뜨거운 무엇이어야 해. 가슴을 불태울 수 있을 만큼 뜨거운 것.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일제 캔맥주가 보였다. 쌉소름하면서 뒤끝이 개운한 맛이라며 남편이 좋아하는 맥주 브랜드다. 승연은 캔 꼭지를 따고 단숨에 맥주 하나를 들이켰다. 갈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밥 안 먹어?” 남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희미하게 들렸다. 어지럽고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바람이 필요해…. 푸른빛이 도는 거실을 지나 베란다로 나갔다. 늦가을 찬 공기가 구멍 송송 뚫린 가슴 사이를 헤집고 지나갔다. 베란다 아래로 오픈카 한 대가 휘익 지나갔다. 25층에서 뛰어내려 오픈카에 내려앉는 상상을 했다. 바람 샤워가 필요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모든 건 내 선택이었어. 지금 삶은 내 선택의 결과고. 그런데 삶의 어떤 구간은 내 선택이 아닌 운명의 장난으로 채워지기도 해. 예를 들면 혼잡한 시간대의 지하철 객실 같은 거지. 내가 선택할 수 없잖아. 그 시간에, 그 객실에 올라타는 거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잖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구간이지. 어떤 지하철 운행 기사를 만날지, 내 옆의 승객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빽빽한 콩나물시루 안에선 누가 내 가슴을 비벼대도, 내 엉덩이를 주물럭거려도 속수무책이라고. 그건 내 선택이 아니란 말이야.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삶엔 선택이 불가한 운명적인 구간이란 게 있잖아.

내가 왜 거기서 무얼 어떻게 했는지. 신내림이 그렇다며. 거부하면 내 주변 사람이 다치고 거부할수록 아프다며. 그런 운명을 어떻게 피해. 승연은 눈을 감았다. 잠시 유보됐던 기억이 갈피를 못 잡고 작동하기 시작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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