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28] 기순아 너의 꿈을 응원해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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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1-17 06:30:23

편입을 준비하려면 영어 성적이 월등해야 했다. 승연은 종로 어학원에서 영어 강좌를 듣기로 했다. 영어를 수강하러 종로까지 가려면 시간 배분을 잘해야 했다. 승연은 수원역 근처에 토플학원이 있는 걸 알았지만 그곳에서 수강할 생각은 없었다. 승연은 명문대에 간 오빠나 언니처럼 부모님의 자랑이 되지 못한 게 미안했다.

부모님께 미안하단 생각보다 승연의 통학을 안타깝게 여기는 가족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방학이 되어 식구 얼굴 맞대는 시간이 길어지는 게 걱정이었다. 학교에서만 물과 기름이 아니라 집에서도 승연은 물과 기름이었다. 오빠·언니는 문명사회에 속했고 승연은 미개사회에 속한 사람 같았다. 기실, 문명사회에서 꾸는 꿈은 구체적이며 현실적이고 미개사회에서 꾸는 꿈은 모호하고 비현실적이었다.

꿈을 실현하는 일이 통학 시간보다 오래 걸릴 거란 걸 승연은 오산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 깨달았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졸업 후 어떤 꿈을 가지고 있냐고 물었을 때 꿈이 없다고 말한 건 진심이었다.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버스 시간표를 암기하고 탑승 시각을 놓치지 않는 것이, 꿈을 실현하는 빠른 길이란 것밖에는. 정기순을 꼬드겼다. 기회가 되면 반드시 미국 가서 공부하는 게 꿈이라고 그녀가 말한 게 기억났다.

승연은 기순에게 편입하겠다는 계획을 털어놨다. 기순에게도 통학 거리가 있으니 편입 준비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승연이 특별히 기순의 미래를 생각해서 편입을 준비하자는 의도는 아니었다. 단순히 학원 짝꿍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런 승연의 속내를 알 리 없는 기순은 자신에게 편입 계획을 말해 준 승연이 좋았고 자기와 함께 준비하자는 제안도 좋았다. ‘티오’가 자주 발생하는 학교 리스트를 뽑아 서류 전형·시험 유형까지 공유하니 자기도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더 좋았던 건, 학교 동기들과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 여긴 승연이 먼저 다가온 것이다. 티 낸 적은 없지만 내심 예쁘고 잘사는 승연과 가깝게 지내고 싶었다. 설움이 많은 기순 엄마는 ‘예쁘고 똑똑하고 잘사는 애’를 친구로 둬야 한다고 말했다. ‘승연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가면 엄마가 좋아할 거야. 예쁘고 똑똑하고 잘사는 친구를 두는 건 자산이라 했어, 인맥 자산.’ 기순은 동기들이 매번 수업이 끝나자마자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는 승연의 모습을 보고 조만간 오산에서 ‘사라질 애’라고 점찍은 이야기를 해 줬다.

사라질 애라고 점찍은 애들은 한 학기가 지나면 대개 사라졌다며 사라질 애들의 특징도 이야기했다. 비싼 브랜드 옷 입고 힐을 신으며 수업 후 바로 버스 타면서 학교 축제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애. 선배들 말이 이 세 가지를 충족하면 2학기 때 100% 사라진다고 했다. 승연이 박장대소했다. “얘, 나 힐은 안 신잖아.”

기순이 짐짓 언니처럼 타일렀다.

“힐 대신 나이키 신잖아. 그래도 어쩌겠니, 현실을 인정 안 하면 너만 힘들어질 텐데.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현실을 벗어나는 최선이란 것을….”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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