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84] 버려진 젊은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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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4-14 06:20:30

“아따, 서울서 온 양반들인갑서. 망월동 답사하러 왔소? 여그가 6년 전에 광주시립공원묘지 할라고 했다가 망월동 묘지가 돼부렀제.” 기사는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얘길 하려는 태세였다. 말이 빨랐다.

“죽은 사람들 묻어 놓는 거는 똑같은디 쪼까 의미가 다르제. 걍 전두환이가 계엄군을 보내 무력으로 진압해 부렀자네. 신문·방송에서 나오는 거 다 거짓말이여. 유언비어 아니랑게. 나가 두 눈으로 똑바로 봤다니께. 계엄군들이 무지하게 많은 시민을 총칼로 죽였당게. 아조 광주 바닥이 피바다였어. 죽은 시민들 여그 망월동 묘지로 실려 왔어라. 영구차 그런 게 있었가니? 걍 손수레, 청소차로 막 실어 갖고 쏟아 부어 부렀제. 시상에 전쟁 말고 그런 경우가 어디 있가니?”

태주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고 승연은 기사의 과장된 호들갑이 부담스러웠지만 두 눈으로 다 봤다는 말에 대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묘지는 황량했다. 공동묘지라 으스스할 줄 알았는데 가슴이 먹먹했다. 얼마나 많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저곳에 묻혔을까. 봉분 앞마다 본관과 이름이 적힌 묘비석이 놓였고 봉분을 닮은 키 낮은 나무가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었다. 간간이 형형색색의 꽃다발이 놓여 있긴 했지만 그래도 묘지는 쓸쓸했다.

묘지 상태로 보니 5·18 영혼들은 택시 기사 말처럼 손수레·청소차로 옮겨진 채 아무렇게나 버려진 운명 같았다. 태주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태주는 어느 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회색의 초라한 비석엔 류동운지묘라 새겨져 있었다. 태주는 곁으로 다가온 승연에게 나직이 말했다.

“선배야, 한신대 신학과 2학년 류동운. 우리 선배지. 목사 아들이었어. 5월17일 기숙사에서 나와 광주로 갔지. 류 선배는 18일부터 시위에 동참했고 연행됐다가 풀려났어. 그러다 다시 금남로로 나갔고. 끝까지 도청 사수하다 27일 계엄군 총에 사망했어. 계엄군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도 간 거야. 아버지가 만류하니까 아버지, 붙잡지 마세요. 다른 집 자녀들이 다 이 나라를 위해 희생을 하는데 왜 자기 아들만 보호하려 합니까. 아버지의 평소 소신이 이럴 때 흔들리면 안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설교 말씀에 역사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가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만 이 역사가 큰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때 아버지 신념이 흔들리지 마시고, 붙잡지 말아 주세요. 그랬대. 대학교 2학년생이. 죽을 걸 알았는지 유서로 한 줌의 재가 된다면 어느 이름 모를 강가에 조용히 뿌려 달라고 했대. 나는 어땠을까. 나는 선배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자기 신념을 목숨과 바꾸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목숨 때문에 신념을 굽히는 건데. 목숨이란 거, 그렇게 가벼운 거 아니거든. 교수는, 목사는, 정치인은, 지식인은 역사의 십자가를 져야 해. 책임 있는 사람들은 침묵해선 안 돼.”

태주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석양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던 모습이 떠올랐다. 태주가 진 짐은 언제쯤 가벼워질까.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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