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 : 28>
‘촛불로 시작해 산불로 망했다. 역시 하늘은 이 나라를 버리지 않았다.’ 피를 말리며 희비가 엇갈리는 대선 결과를 지켜본 시민들의 말이다. 예측한 대로 1960년 출생의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20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유세과정에서 ‘어퍼컷 세리머니’를 했던 그는 결국 ‘승리의 어퍼컷’을 선보였다. 국민의 심판은 늘 현명한 것 같다. 낙선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의 득표율 차이는 단 0.73%(24만7000여표)였다. 그야말로 박빙의 승부였다. 이번에도 국민은 윤 당선인이 내건 공정과 상식의 회복이란 깃발에 힘을 실어주면서 자연스럽게 정권교체를 선택했다.
대선 승리로 윤 당선인은 현대정치사에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다. 처음 도전한 정치인이 대선에서 승리한 것도, 헌정사상 최초의 검사 출신 대통령이 된 것도, 서울대 법대 출신이 청와대 주인이 되는 것도 모두 처음이다. 또 윤 당선인은 서울 출신 첫 대통령이다. 한때는 좌천의 아픔을 당하기도 했지만 적폐청산의 칼잡이에서 겨우 8개월 만에 국가 최고지도자가 된 것이다. 파란만장한 인생의 하이라이트를 이날(9일) 마침표를 찍었다. 그런 그를 국민이 대통령으로 선택한 것은 윤 당선인의 말마따나 정치권 전체가 확 바뀌어 공정과 상식으로 국정이 운영되어야 한다는 열망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5년 전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윤 당선인과 똑같은 메시지를 냈다. “공정과 통합”을 내세우며 “국민만 보고 가는 대통령”을 자임했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은 뜨거운 지지와 함께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간 뒤로는 그런 다짐과는 달리 독선적 인사와 편 가르기 진영 정치에 몰두해 나라를 분열시켰다. 그 결과 분노한 민심의 심판을 받아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고, 자신에 의해 검찰총장에 올랐다가 정적이 된 윤 당선인에게 청와대를 내줘야 하는 처지가 됐다. 20여년간 무난하게 검사 인생을 살아온 인간 윤석열이 국민에게 각인되는 사건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어록과 ‘박근혜 특검’으로 대중에게 어필된 것, 그리고 정점은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의 극한 대치로 공정과 상식의 아이콘으로 부각된 것이다. 문재인정부와는 ‘애증’의 관계가 되었다.
‘권력에 굴하지 않는 공정검사’ 이미지를 쌓았고 ‘반(反)문재인 대표성’을 지닌 인물로 정권교체의 선봉자가 되었다. 간발의 차이로 대선 승패가 갈린 탓일까. 문득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고사가 떠오른다. 디오니시우스왕은 권력과 부를 부러워하는 신하 다모클레스에게 왕좌에 앉아보라고 권유했다. 좋아라하고 그 왕좌에 앉은 신하는 한 올의 말총에 매달린 칼이 자신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음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권좌에서는 늘 긴장해야 함을 일깨워주는 ‘다모클레스의 칼’이란 경구가 유래한 배경이다. 그런 맥락에서 윤 당선인이 0.73% 차 초박빙 승리를 ‘다모클레스의 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절반에 가까운 반대표를 던진 유권자의 존재를 늘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독주의 유혹을 뿌리치는 등 자계(自戒)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 자리는 등극하는 순간 내리막길이다. 머리 위에는 시퍼런 칼이 있고, 그 칼을 매단 실오라기는 시간이 갈수록 가늘어지는 법이다. 따라서 출발부터 여소야대로 험난하다. 여당 송영길 대표의 ‘식물 대통령’이 될 수 있다던 말이 새삼 떠오르면서 소름이 끼친다. 윤 당선인 앞에는 패배의 아픔을 곱씹고 있는 172석 단일 거대 정당이 버티고 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승리감에 가슴 벅찬 당선 첫날 밤새워 고뇌했던 ‘어떻게 분열을 막을 것인가’란 과제는 오늘 대한민국 20대 대선의 승자가 된 당선인 앞에 놓인 숙제이기도 하다. 더구나 대통령 당선인은 한 번도 나라 전체 문제를 다루어본 적이 없지 않는가. 그러니 문 대통령이 바라듯 통합정부라는 공통 약속에서 출발하자. 링컨을 필두로 루스벨트, 처칠, 이승만, 브란트, 만델라, 김대중을 비롯해 위기 시의 대정치인들은 모두 정당의 경계를 넘어 통합정부를 꾸린 사람들이었다.
통합인수위를 꾸려 함께 나라의 ‘근본과제’와 ‘공통목표’를 찾아내고 ‘공통공약’을 추출하며 경향의 ‘공통인재’를 널리 찾아야 한다. 그리고 국정을 잘할 수 있는 ‘분야별로’ 나눠 맡기도록 해야 한다. 또한 국민 절반의 의견과 정책도 함께 수렴해야 한다. 이제 선거운동을 적극적으로 했던 열렬한 지지자들이 자리를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선거를 도와준 측근들을 대거 관직에 임명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관직을 주는 행위는 과거 많은 폐해를 불러일으켰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5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뤄내면서 새 정부가 출범한다. 보통 새 정부가 들어서면 각 부처 장관뿐만 아니라 산하 기관장들도 새로 임명된다. 지난 정부에서 임명된 기관장들의 임기가 보장되긴 하지만 관행적으로 사표를 받아왔다. 그러나 이번 정부에선 이런 관행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지난해 대법원이 산하 기관장들에게 사표를 강요한 혐의(직권남용 등)로 재판에 넘겨진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에게 징역 2년 확정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자칫 임기가 남은 기관장에게 사표를 요구했다가 실형까지 받을 수 있는 셈이다. 10일 기준 공기업과 준정부기관 등 공공기관은 350개다. 공공기관운영법에 따르면 기관장은 등은 임원추천위원회가 추천한 인사 중에 주무기관의 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사실상 대통령이 인사권을 쥐고 있는 자리다. 기관장뿐만 아니라 이사와 감사 등을 합치면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자리는 2000여개 정도로 추정된다. 법이 보장하는 공공기관의 기관장 임기는 3년, 이사와 감사의 임기는 2년이다. 이 중 기관장의 경우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약 70~80%가 임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의 산하기관장이 법적으론 임기를 보장받아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얘기다. 그만큼 공직사회가 예의주시하고 있는 사안이지만 대통령이 실제로 몇 개의 산하기관장 인사에 직접 관여하는지도 불투명하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새 정부가 출범해도 산하기관장이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상황”이라면서 “공직사회도 이런 상황에 처하는 산하기관들이 생길까봐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부작용을 해소하고, 전문성이나 관련 경력이 없이 이뤄지는 이른바 ‘낙하산’ 인사를 막기 위해 전문가들은 미국의 ‘플럼 북(Plum Book)’ 시스템을 제안한다. 미국에선 플럼 북에 대통령이 인사권을 가진 9000여개 직책의 임명 요건 등을 규정하고 있다. 4년마다 발간하는데 정당의 기여도 등에 따른 공직 임명이 이뤄진다. 플럼북 같은 시스템 도입은 별도의 법률 개정이 필요하지도 않고, 지금 우리 공공기관 인사의 문제점도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공직사회도 새로운 기관장의 후보군을 미리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측근보다 전문성 등을 토대로 평가가 이뤄질 수 있다”고 말한다.
문 정부가 그랬다. 낙하산 인사 근절은 문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 정부는 지난 4년 동안 금융공공기관의 감사나 비상임이사 약 42%가 정치권 낙하산 인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를 비롯해 국정원까지 장악을 했다. 선거 때 도움을 받았다 해도 인사에는 엄격해야 한다. 외면할 수 없어 임명하면 결국 독배가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 나라를 퇴보시키는 엽관제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쳐야 한다. 공공기관에 발전은 보은 인사가 아니라 전문가를 발탁하는 것이다. 특히 국회의원 등 선출직 공무원의 공천도 충성도나 인기도가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평가된 내용을 바탕으로 객관적 공천을 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친인척 관리다. 대통령 직속 특별감찰관 임명이 시급하다. 대통령 배우자 및 4촌 이내 친족, 대통령실 수석비서관을 들여다보는 자리다. 그런 자리가 여태껏 공석이라는 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자신들이 야당 시절 발의한 법인데도 문재인정부는 후임자를 임명하지도 않고 엉뚱하게도 사실상 식물기관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를 만들어 아까운 예산만 낭비하고 있다. 오만함을 겸허함으로 착각했던 지난 5년이었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좌파세력들이 ‘평화’를 빙자하며 진을 치고 있는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도 색출정리하고, 보수파 위원으로 추가해 본래 취지에 맞는 자문위원회가 되어야한다.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도서 3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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