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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아 성문이 열릴 무렵 평강은 노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 채 길을 나섰다. 노파는 함께 가 주겠다고 했지만 공주는 극구 사양했다.
평강은 노파가 일러준 대로 대성산을 향해서 걸어갔다. 산의 초입을 지나 산기슭에 이르자 움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산자락을 붉게 물들인 진달래꽃이 햇빛을 받아 더욱 선명한 색감을 뽐내고 있었다.
평강은 움집 앞에 이르렀다. 짐승의 침입을 막기 위해 쳐 놓은 울타리가 눈에 들어왔다. 초라한 집에 어울리지 않게 촘촘하고 단단한 울타리였다. 공주는 사립문을 열고 움집 안으로 들어갔다.
공주는 대궐의 측간보다도 못한 움집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곳이 바로 그녀가 선택한 삶의 터전이었다.
평강은 얕은 기침 소리를 냈다. 그러자 문으로 쓰이는 거적이 젖혀지더니 잦아드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적 너머로 보이는 내부는 볕이 잘 들지 않는지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뉘시오?”
노파가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주름지고 깡마른 얼굴에 머리가 새하얗게 센 모습은 보기만 해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노파는 낯선 사람이 나타나자 불안한지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누구인지 물었다.
공주는 노파를 안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이곳이 온달 님 댁이 맞지요?”
평소에 찾는 이 하나 없는 산골에서 생전 들어 본 적 없는 아리따운 목소리의 처자가 아들을 찾으니 노파로서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아들이기는 하오만, 무슨 일로 그러시오?”
공주는 자신이 제대로 찾아온 것을 확인하자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노파 앞으로 성큼 다가서며 예를 갖췄다.
“어머니, 절 받으세요.”
온달 모친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낯선 여자가 갑자기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며 절을 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거적을 걷고 더듬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우리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요?”
불안한 걸음걸이를 보이던 노파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공주는 그제야 주막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온달 모친이 눈이 멀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평강은 황급히 달려가서 온달 모친을 부축해 일으켰다.
“어머니, 조심하세요. 아드님은 아무 일도 없답니다.”
온달 모친은 공주의 말을 듣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온달이 세상 전부였다. 그는 아들이었고, 남편이었고, 눈과 손발이기도 했다. 온달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더는 살아갈 의미가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단지 아드님에게 제 한 몸 의탁하러 온 것뿐입니다.”
온달 모친으로서는 도통 모를 말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바보라고 하는 자기 아들에게 시집올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온달 모친은 공주의 손을 만져 보고 체취를 맡았다.
“처자에게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구려. 손은 부드럽기가 비단과 같고. 내 비록 앞이 보이지는 않지만, 대갓집 여식이란 건 알겠소. 그런데 어찌 우리 아들 같은 반편이를 찾아온 거요? 혹시 무슨 협박이라도 받은 거요?”
“반편이라니요. 아드님은 누구보다 순수하고 속이 깊은 분입니다. 제가 비록 직접 만나 뵌 적은 없지만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그분의 됨됨이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 분이라면 제 한 몸 맡겨도 좋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온달 모친은 공주의 머리가 어떻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멀쩡한 처자가 이런 무모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양갓집 처자가 이런 험한 곳에서 어찌 산단 말이오? 우리 아들이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장난치러 온 모양인데 썩 돌아가시오. 비록 지금은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지만 그렇게 막 대해도 될 집안은 아니오.”
온달 모친은 무슨 얘기를 더 하려다가 급히 멈췄다. 그러고는 큰 잘못이라도 한 양 낯빛이 어두워졌다.
“어쨌든 어서 돌아가시오. 이곳은 처자가 있을 곳이 아니오.”
불안감을 떨치려는 듯 매몰차게 말한 그녀는 서둘러 움집 안으로 들어갔다.
평강은 온달 모친의 등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아드님을 꼭 만나야 합니다.”
“깊은 산으로 나무하러 갔으니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올 거요. 산골은 금방 어두워지니 어서 돌아가시오.”
움막 안으로 들어간 노파는 이 한마디를 남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 시련에 물러날 공주가 아니었다. 평강은 마당 한구석에 놓여 있는 편편한 돌 위에 앉아 온달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산새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마냥 경쾌하게 지저귀고 있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맑고 깨끗한지 공주는 문전박대당한 자신의 처지를 금세 잊고 기분이 좋아졌다.
대궐에서만 지냈던 공주는 산골의 모든 것이 신기했다. 숲에서 불어오는 솔잎 냄새나는 바람, 시원스레 들리는 개울의 물소리,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뛰어다니는 토끼와 다람쥐 같은 산짐승. 무엇 하나 예사롭게 보이는 것이 없었다.
평강이 산골 풍경에 홀려 있는 동안 해가 산등성이를 넘어갔다. 어스름이 공주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아직 동장군의 꼬리가 사라지지 않은 산골에 밤이 찾아오자 공주는 추위를 느꼈다. 그녀는 오들오들 떨며 목을 빼고 울타리 너머를 쳐다봤다. 온달을 기다리는 마음이 한층 간절해졌다.
온달 모친은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그녀는 이제 처자가 돌아갔으리라 생각하고 거적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추위에 떨며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온달 모친은 은근히 걱정이 됐다. 산중의 저녁 공기는 오한이 들 정도로 차가웠다. 저렇게 밖에 오래 있다가는 심한 감기에 걸릴 수 있었다.
마음이 약해진 온달 모친은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낯선 사람을 들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두 사람이 거적을 사이에 두고 고민할 때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온달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흥얼거리는 노래임을 아는 모친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평강 역시 반갑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산중에, 그것도 한밤에 이곳으로 올 사람은 온달밖에 없을 터였다. 드디어 이야기로만 듣던 사람을 실제로 만난다 생각하니 몸이 떨릴 정도로 흥분됐다.
사립문이 열리고 커다란 체격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우람한 어깨에 어울리지 않는 순진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온달은 마당에 사람이 서 있는 걸 보고 씩씩하게 말했다.
“어머니, 날도 아직 쌀쌀한데 왜 나와 계세요? 늦어서 죄송해요.”
온달은 공주를 어머니로 착각한 것이었다. 그러자 거적이 들리더니 온달 모친의 음성이 들렸다.
“에미는 여기 있다.”
온달은 깜짝 놀라서 공주를 쳐다봤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좋은 향기가 풍겨 오고 있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아주 기뻐요, 낭군님!”
온달은 낯선 여인의 출현에 어안이 벙벙했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정신을 가다듬은 온달이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낭군을 잃어버리셨나 보네요. 저는 아씨의 낭군님이 아니랍니다.”
너무나 어수룩한 대답에 평강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대궐에서 엄숙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만 보다가 이처럼 순수한 사람을 만나니 한없이 유쾌했다.
공주는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아니요. 제대로 찾았네요. 이제부터 저는 당신과 여기서 살 겁니다.”
공주는 모든 일이 결정된 양 말했다.
온달은 어찌할 바를 몰라 어머니의 얼굴만 쳐다봤다. 모친은 공주의 당돌한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모친이 겁먹은 소리로 말했다.
“자칫하면 우리 모자가 곤경에 빠질 수 있소.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이곳에서 묵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돌아가세요.”
처자의 집에서 이 사실을 알면 모자의 목숨이 온전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공주는 일단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감개무량했다. 온달 모친의 마음이 바뀔지도 몰랐기에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온달의 모친이 아들에게 일렀다.
“너는 뒤쪽 창고에서 자라”
고구려에는 집집이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가 따로 있었는데, 이를 부경(桴京)이라 했다. 온달의 움집도 구색은 갖추고 있어 창고로 쓰이는 작은 움막이 있었다.
모친과 공주가 방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온달은 한동안 마당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저 여인은 누구이고, 다짜고짜 자신을 낭군이라 부르는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는 왠지 싫지 않았다. 어렴풋이나마 보았던 공주의 갸름한 얼굴 선과 꽃보다 진하고 향기로운 체취를 떠올리면 온몸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의 얼굴에 예의 바보 같은 미소가 번졌다.
다음 날 동이 틀 무렵, 움집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부경에서 잠을 자던 온달은 놀라서 달려갔다.
거적을 젖히고 안을 들여다보니 얼굴이 빨개진 처자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바닥에는 깨진 그릇 조각이 널려 있었다. 온달 모친은 소리를 듣고 이미 상황을 짐작한 듯 심상한 표정으로 일어나 앉아 있었다.
“호들갑 떨 거 없다. 그냥 그릇이 깨진 것뿐이야. 얘야, 깨진 그릇을 치우렴.”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고 잔뜩 움츠려 있던 평강은 의외로 다정한 온달 모친의 반응에 눈물이 흘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음식을 준비한 정성을 기특하게 여긴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말은 공주의 기대를 저버렸다.
“귀한 신분인 듯한데 조금이라도 다치면 우리 처지가 난처해진다.”
이 말을 듣고 평강은 서러운 생각이 들어서 더욱 눈물이 쏟아졌지만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이제 시작일 뿐인데 벌써 낙심할 수는 없었다.
평강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쌀은 어디 있나요? 제가 아침을 준비할게요.”
처자가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온달 모친도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쌀을 구경한 게 언제인지 모르겠구려. 형편이 좋지 않아 곡식을 구하기 어렵다오. 허구한 날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연명하고 있소.”
어려운 형편을 과장해서 얘기하면 철없는 처자가 금세 실망하고 돌아가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동명심훈(東明心訓)’이란 책을 보면 한 말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 베도 꿰맬 수 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마음만 같으면 그만이지 어찌 빈부를 따지겠습니까.”
평강은 조금도 괘념치 않는다는 듯이 밝은 얼굴로 시렁에 걸려 있는 말린 느릅나무를 내리더니 껍질을 벗기고 보리쌀을 섞어 아침을 준비했다. 비록 서툰 손놀림이지만 표정만은 제법 진지했다.
온달 모친은 말문이 막혀서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온달은 공주의 당돌한 모습을 보고 무엇이 좋은지 마냥 웃기만 했다.
온달은 매일 평강이 지어 준 아침을 먹고 일하러 갔다. 공주가 정성껏 돌봤기에 일을 나갈 때 어머니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모친 또한 매사에 흐트러짐이 없이 열성을 다하고 늘 쾌활하게 자신의 수발을 드는 공주를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세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연대감이 생겨났다.
어느덧 평강이 살림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온달이 도성 저자에 나갔다가 돌아오더니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공주를 조용히 불렀다. 그녀는 무슨 일인가 하여 밖으로 나갔다.
온달이 쑥스럽게 웃으며 붉은 댕기 하나를 손에 쥐여 줬다.
“저자에 나갔다가 예뻐서 하나 샀소.”
공주는 댕기를 보며 온달의 깊고 따스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동안의 수고로움이 눈 녹듯 사라지는 듯했다. 온달은 쑥스러운지 서둘러 자리를 떴다.
방 안으로 들어온 평강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온달 모친이 그 소리를 듣고는 무슨 좋은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낭군님께서 댕기를 사오셨지 뭐예요.”
모친은 공주의 들뜬 목소리에서 아들에 대한 깊은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 동이 트자 온달 모친은 공주와 아들을 함께 불렀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는 없지 않으냐. 너희만 좋다면 이참에 혼례를 올리도록 해라.”
온달과 평강은 정화수 한 그릇을 떠 놓고 혼례를 치렀다. 어머니의 주관에 따라 하나씩 치러지는 의식을 통해 두 사람은 한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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