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 키운 전두환
전두환과 노태우는 1951년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으로 입교했다. 그후 대통령이 될 때까지 노태우는 전두환 그늘에서 컸다 1987년 6월2일 전두환은 청와대 한옥 상춘재에 민정당 간부들을 초청해놓고 노태우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리고 6월10일 노태우는 올림픽 공원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되었다. 이 자리에서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은 일단 자기가 간선제(체육관 간접선거)에 의해 대통령이 된 다음에 수용하겠다는 내용으로 수락 연설을 했다.
1987년 1월4일 발생한 박종철 고문 사건을 쟁점화하여 들불처럼 번진 소요는 김대중이 이끄는 반골단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와 김영삼 추종자들이 붉은 신부들과 함께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이 맨 앞에 내건 구호는 ‘직선제’ 개헌이었다. 그런데 노태우가 ‘수락 연설’에서 자기까지는 간선제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니 전국이 얼마나 소란해졌겠는가? 노태우의 수락 연설이 곧 6월 항쟁을 자초한 것이다.
전두환의 노태우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이었다. 노태우를 후계자로 지명하기 직전에 김정렬 전 장관이 전두환을 찾아왔다. 공군 창설 멤버였던 그는 공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역임했고, 공화당 당 의장과 미국대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는 전두환에게 노태우를 신뢰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여러 번 다짐하듯이 했다. 그는 포커 게임 멤버들의 좌장이었다. 포커 게임에서 관찰한 노태우는 대통령감도 아니고 신의를 지킬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전두환은 노태우를 믿었다. 노태우가 내무부 장관을 하면서 이권 청탁자들이 몰려드는 것을 장세동을 시켜 모두 차단시키면서 고이 길렀다. 체육부 장관도 시켜주고, 올림픽조직위원장도 시키면서 여러 경험을 쌓도록 키웠다. 당시의 상식에는 어긋났지만 ‘원외대표’ 자리도 수락해 주었다. 직선제에 대한 노도와 같은 여론을 잠재우는 방법은 오로지 직선제를 당장 수용하는 길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노태우를 불러 조리있게 상황을 설명하고 직선제를 수용하라고 설득했다.
첫째, 직선제를 수용하지 않으면 정국이 소용돌이 쳐서 계엄령을 선포해야 할 단계까지 이르게 된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88올림픽이 물 건너가고 경제에도 악영향을 주고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안된다. 둘째, 직선제가 아니면 야당이 후보를 보이콧한다. 그러면 노태우 혼자 출마해서 혼자 대통령이 된다. 이런 대통령이 국민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겠느냐? 셋째, 만일 야당이 의표를 찔러 출마하면 여론은 야당으로 쏠린다. 그러면 당신이 대통령이 안될 수도 있다. 넷째, 설사 간선제로 대통령이 된다 해도 사태가 지금 이상으로 혼잡해진다. 다섯째, 당신이 당신 입으로 직선제를 선포하면 반드시 이긴다.
모든 참모들이 노태우를 설득했지만 노태우는 직선제로 가면 후보를 사퇴하겠다고 어리광을 부렸다. 그리고 각하를 설득해 간선제로 가게 해달라고 졸랐다. 답답한 나머지 전두환이 비밀리에 노태우를 불렀다. 노태우의 말이 걸작이었다. “직선제를 수용하겠습니다. 하지만 각하께서 이런 말씀을 꼭 해주십시오. 노태우가 각하에게 직선제를 수용할 것을 건의 드렸더니 각하께서 크게 노해 호통을 치셨다. 이런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십시오. 꼭 그렇게 해 주십시오.”
자기는 띄워주고 전두환은 죽으라는 기똥찬 발상이었다. 자신은 민주주의적 영웅으로 띄워주고 전두환은 스스로를 반민주적인 폭군으로 이미지화 시켜야만 자기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두환은 이 치기 어린 노태우를 끝까지 달래고 설득했다.
‘6.29 직선제 선언’은 전두환이 만들어 직접 발표했지만 이는 노태우에게 쥐어준 귀중한 선물이었다. 하지만 노태우는 9월29일까지 경호실장 안현태를 통해 “내가 직선제를 수용한 의사를 밝힐테니 각하가 나를 야단치는 모습을 연기하시게 해 달라”고 여러 차례 끈질기게 종용했다. 이것까지는 전두환이 수용할 수 없었다.
결국 노태우는 어쩔 수 없이 9월29일 민정당 중앙당 회의실에서 ‘국민 대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이라는 제목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직선제를 수용한다는 뜻을 그의 입을 통해 발표한 것이어서 인기가 대단했다. 6.29 직선제 선언은 전두환의 입을 통해 발표된 것이고, 9.29 선언은 같은 직선제 내용이지만 노태우 입을 통해 발표된 것이다.
그리고 노태우는 12월16일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평화적인 정권이양, 대한민국 최초의 전통을 세운 역사였다. 이승만도 장기 집권, 박정희도 장기 집권이었다.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는 영국에서도 1215년 마그나카르타 이후 413년이 지난 후에야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당시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믿는 국민은 거의 없었다.
4월26일로 예정돼 있는 총선,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2월25일의 취임일 이전에 공천을 완료하고 중선거구제로 가야만 이길 수 있다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노태우는 소선거구제를 고집했다. 그 결과 민정당은 의석수의 41%을 차지하는 소수당이 됐다. 노태우의 발목에 족쇄가 채워졌다. 꽉 막힌 정국을 뚫기 위해 노태우는 90년 1월22일 3당 합당으로 김영삼과 김종필을 끌어들여 의리 없는 김영삼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김영삼은 차기 대통령은 자기가 돼야만 했다. 그런데 정호용이라는 거물이 노태우 다음을 이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정호용을 그대로 두고서는 자기에게 기회가 올 수 없다고 생각한 김영삼은 합당의 조건으로 두 가지를 내걸었다. 하나는 정호용을 출당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광주폭동’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명칭을 바꾸고 보상하는 것이었다.
다급한 노태우는 이 두 요구를 수용했다. 그런데 정호용을 무슨 명분으로 제명할 것인가? 여기에서 정호용이 5.18에 대한 피박을 쓰게 된 것이다. “정호용은 전두환을 따라다니며 출세를 하고 특전사령관이 되어 무고한 광주시민을 학살하면서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원흉이다.” 정호용은 그야말로 동기생으로부터 날벼락을, 그것도 가장 억울하고 기가 차는 날벼락을 맞아 아무런 절차도 없이 죄인이 되었다.
이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한 부인은 자살을 시도했다. 이어서 노태우는 1990년 8월6일 ‘광주보상법’(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에관한법률)을 제정했다. 바로 이 순간이 ‘폭동’이 거룩한 ‘민주화운동’으로 등극하는 첫 순간이었다. ‘5.18민주화운동, 과학적 연구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치꾼들의 흥정의 결과였던 것이다.
노태우의 도끼질
1987년 12월16일 투표에서 당선된 노태우를 전두환이 육사 11기 동기생들과 함께 축하하러 찾아갔다. 이때 노태우는 인간수양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싹수없는 말을 했다. “내가 승리한 것은 순전히 내가 훌륭해서였고, 국민적 인기가 높아서였다. 각하와 민정당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는 국민이 직접 뽑아준 대통령이다. 체육관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이 된 각하와는 격이 다르다.”
놓아먹인 망아지도 이렇게 막돼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때를 본격적인 시점으로 하여 노태우는 전두환을 찍어 내리기 시작했다. 노태우의 대통령 임기는 오로지 전두환을 찍어 내리는데 할당됐다. 그만이 알 수 있는 전두환 관련 정보를 야당과 언론에 흘려주면서 전두환을 공격하게 만들었다.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은 물론 형·동생·매제 그리고 이순자 여사의 친인척 등 모두를 감옥에 넣었다.
“제사 지낼 사람 하나 남기지 않고 감옥에 보냈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언론에 귀띔하여 전두환이 미국에 호텔·골프장·목장을 가지고 있고, 스위스 운행에도 호주에도 돈을 묻어 놓았다는 여론을 일으키게 했다. 노태우 자신은 대통령 명의로 호주 정부에 서한을 보내 “호주에 전두환이 숨겨놓은 재산이 있는지 조사해달라”는 요청을 했고, 이에 호주 정부는 조사를 하여 결과를 통보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각하, 호주에 전두환 재산은 전혀 없습니다.” 노태우가 호주 정부에 조사를 요청한 사실은 대서특필되었지만 호주 정부의 조사 결과는 일체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다. 야비한 수법으로 일국의 대통령 격에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패착질을 한 것이다.
스위스 강제 추방 레만호 프로젝트
레만호는 스위스 알프스 산지에 있는 호수로 일명 제네바호로도 불린다. 스위스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호수로 초승달 모양에 길이가 72km, 너비가 14km나 된다. 올림픽 경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88년 10월 2일 박세직 올림픽조직위원장이 안현태 경호실장을 만나면서 사립학교 교장 한 사람과 정체모를 외국인 한 사람을 데려왔다.
전두환이 쓰러지는 시늉만 내면 즉시 입원될 것이고, 입원만 하면 즉시 스위스로 호송할테니 스위스에서 여생을 마치라는 것이었다. 당시 노태우는 언론을 통해 전두환이 스위스 은행에 천문학적인 규모의 달러를 감춰놓고 있다는 괴담을 확산시켜놓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전두환이 스위스로 나르면 비자금 의혹이 사실로 둔갑되는 것이다.
이 플랜이 성공하면 노태우가 빛을 발할 수 있지만 실패하면 노태우는 ‘퇴임해서도 존경을 받고 추앙 받고 있는 전두환’의 아우라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강력히 밀어 붙였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 안현태 전 경호실장이 대들었다. “그렇게도 망명시키고 싶으면 차라리 목숨을 빼앗아 시신으로나 망명시켜라.” 이 ‘레만호 프로젝트’가 실패하자 노태우는 ‘재산 헌납-사과-백담사 유배’ 프로젝트로 가닥을 잡았다.
김재규가 정신병 걸려 환생한 존재가 노태우
도대체 노태우는 왜 이렇게 정신병자처럼 타락했을까? 당시 국민은 노태우가 이끄는 6공을 전두환이 이끌던 5공화국의 연장선에서 바라보았고, 노태우는 전두환이 키워준 후계자인 것으로 이미지화 되어 있었다. 야당과 운동권은 이런 사회적 인식을 악용하여 노태우의 존재감과 품위를 격하시키려 혈안이 돼 있었다.
야당의 공격 목표는 어디까지나 현재의 정권이지 흘러간 5공 정권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권력인 6공을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더 쉽고 더 효과적인 방법이 6공을 출생시킨 5공을 공격하는 방법이었다. 5공의 약점은 ‘비리’였다. ‘비리’가 있다는 여론은 노태우가 확산시켜놓은 것이었다. ‘5공비리 청산’ 이것이 야당과 운동권이 내건 슬로건이었다.
이에 약삭빠른 노태우가 ‘비리’를 빼내고 ‘5공 청산’으로 슬로건을 바꿨다. 공격목표가 ‘비리’가 아니라 ‘전두환’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5공’ 자체를 멸살시켜야 전두환이 멸살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노태우의 전두환 멸살 작전은 전두환이 지옥으로 떨어져야만, 자기가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위대해져서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으로 인식될 것이라는 신념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88서울올림픽은 전두환이 유치했고, 일본 자금을 가져다 준비시킨 전두환의 작품이었다. 1988년 9월17일부터 10월2일까지 16일 동안 열렸다. 올림픽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 160개국이 참가했고 1만3304명의 선수가 왔고, 이 모습이 104억 시청자들에게 방송되어 국위를 선양했다. 자유롭고 화려하고 친절한 한국의 모습에 동구권 인구가 충격을 받아 자유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노태우는 전두환을 16일 동안 단 한 번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많은 국민은 88서울올림픽을 노태우가 장만한 잔치인 것으로 알고 있다.
10월2일 올림픽 행사가 종료되자마자 국회는 16년 동안이나 잠을 자던 ‘국정감사’를 가동시켜 소문으로 무성한 전두환 관련 의혹들을 모두 도마 위에 올렸다. 전두환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국정감사가 끝난 3일 후 노태우는 고위 당정회의를 소집하여 공격 개시 명령을 내렸다.
“과거에 잘못된 일을 은폐하거나 적당히 넘기지 말고 능동적으로 밝히고 명쾌하게 처리하라.” 노태우에 잘 보이는 길은 전두환을 발가벗기는 것이었다. 이원조 의원은 전두환을 찾아가 “합천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어서 릴레이 방문이 이어졌다. 윤길중(민정당 대표)은 “연희동을 떠나 수양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정호용 의원은 “대통령까지 지냈으니 훌훌 털고 시골에 가 있는 것이 좋겠다”, 권익현 의원은 “연희동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언론은 너도나도 연일 “사과와 낙향만으로는 부족하다. 재산을 헌납하라”고 떠들었다.
이에 대해 전두환의 반응이 없자 드디어 노태우의 목 조르기가 시작됐다. 88년 11월7일 전두환 사촌동생을 구속하고 처남 회사에 세무사찰을 시켰다.
11월12일, 친형과 또 다른 사촌동생을 구속했다. 15일에는 처남을 구속했다.
여기까지 해놓고 11월16일 이원조를 전두환에 보냈다. “연희동을 2~3개월만 떠나 있으면 더 이상의 친인척을 구속하지 않겠다.”
끈질기고 유치한 행패에 전두환도 지쳤다. 더 이상 버티면 국가 망신·육사 망신이라고 생각하여 결국 ‘사과-재산헌납-낙향’ 요구를 수용하고 말았다. 백담사 행이었다. 88년 11월23일 오전 9시30분 자택 응접실에서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27분 동안 사과문을 읽고 “2~3개월만 가 있으라”는 노태우의 말을 믿고 백담사로 떠났다. 전기도 난방도 없는 시베리아 고지에서 그는 장장 769일, 2년 1개월 8일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백담사에 유배돼 있는 동안 노태우는 방문자를 통제하고 감시했다. 백담사에 끝까지 유배시키려 했지만 여론에 밀려 그나마 769일로 끝낸 것이다. 귀환할 때도 조건을 달았다. “연희동으로 직접 갈 수는 없다. 먼저 제3의 장소로 가 있다가 연희동으로 돌아가라.”
노태우에게 업적은 있었는가? 북방정책? 1990년 그는 ‘이미 붕괴되고 있는 소련’을 상대로 ‘북방정책’을 개발한다며 돈 자랑을 했다. 30억 달러를 차관으로 준다고 했다. 14억7000만 달러까지 소련으로 송금한 상태에서 소련이 붕괴됐다. 1988년 12월7일, 붕괴되기 2년 전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유엔에서 소련의 붕괴를 이미 예고했다. 동구에서 일방적으로 소련군을 철수하고 바르샤바조약기구를 일방적으로 해체한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결국 14억7000만 달러는 그 후 러시아가 인수받아 쓸데없는 탱크통 고철로 받고 손을 털었다. 소련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은 것 없이 한국에 와 있던 전술 핵무기만 일방적으로 철수시키는 바보짓을 했다. 소련과 북괴의 환심을 사기 위한 졸부 근성이었다.
북한과도 잘해보겠다며 간첩보다 더 위험한 임동원 당시 통일부 차관을 내세워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었지만, 그것은 북한에 달러와 물품을 지원할 수 있는 창구에 불과했다. 이 남북기본법 때문에 국가보안법이 상당 부분 파괴됐다. 통일부 장관만 승인하면 목사들이나 대북지원 단체들이 북을 드나들면서 얼마든지 국보법을 유린할 수 있게 했다. 노태우는 인간도 아니었고 능력도 아니었다.
1988년 2월25일 대통령에 취임한 노태우는 4월1일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규정했다. 이 조치로 인해 야권과 운동권이 승리감에 도취해 노태우 정권 타도에 더욱 열을 올렸다. 1988년 6~7월 2개의 청문회가 동시에 국민의 관심을 블랙홀처럼 흡수했다. 5공청문회(6.27)와 광주청문회(7.13), 모두가 다 전두환을 짓이기기 위한 난자수단으로 노태우가 주도한 작품이었다.
야당과 운동권을 동원하여 전두환을 도마 위의 육회로 만들려는 심보였다. 광주청문회는 전두환을 발포 명령자로 몰았다. 청문회는 전두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사람들만 내세웠다. 허풍을 치고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환영을 받았고, 황당한 거짓말로 기사를 쓰면 신문이 더 잘 팔렸다.
전두환이 프랑켄스타인보다 더 괴물이고 갈아 마셔도 부족한 웬수가 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을 졸개처럼 부렸고, 히틀러에 버금가는 독재를 했고, 온 가족 일가친척들이 떼거지로 달려들어 부정축재를 한 세기의 갱스터 알 카포네의 후예가 된 것이다.
광주특위 위원장은 문익환의 동생 문동환 의원, 그를 중심으로 28명의 매머드 위원회가 구성되어 1991년 5월까지 청문회를 열고 보고서를 썼지만 그들이 원하는 3가지 답안, 즉 발포명령자·헬기사격·집단암매장에 대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 이 세 가지는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세 가지의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서울지방검찰청과 군검찰부가 공동으로 1995년 7월18일 작성한 ‘5.18관련 수사결과’에 증명돼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의 람보 정국
19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은 ‘문민대통령’이라는 간판을 높이 걸고 군사정권을 때려잡는 영웅이 되려 했다. 상징을 만들어 내는 방법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정치 교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이른바 ‘감의 정치인’이었다. “놀랬제이?” 하나회의 상징 인물들을 기습적으로 예편 시키면서 청와대 회의에서 자랑스럽게 한 말이었다.
그는 누구로부터 코치를 받았는지 취임한지 보름도 채 안되어 하나회 출신 육사 17기 김진영 대장을 육군 참모총창 자리에서 해임하여 예편시켰다. 보안사령관 육사 19기 서완수 중장을 전격 해임했다. 이어서 100일 동안 대장(4성) 7명과 19명의 장군을 모두 해임·예편시켰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며 미국보다 북한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 운동권과 종북주의자들로부터 환호를 받았고 “북에는 수입을 해서라도 쌀을 보낼 것”이라는 말로 친북 성향을 드러냈다. 빨치산의 상징 ‘비전향장기수’ 이인모를 북송했고, 외세에 반대한다며 그 증표로 중앙청과 남산 외인아파트 2채를 폭파시키는 만용까지 부렸다.
그로 인해 군의 위상이 추락되어 군은 아무나 함부로 밟아도 되는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추락했다. 군을 존중의 대상에서 밟아도 되는 존재로 추락시킨 인물이 바로 하나회에 대한 질투심이 충천했던 육사 15기 권영해 당시 국방장관이었다. 군복 전체가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짧은 머리는 군발이로 손가락질 당했다. 차세대 전투기를 F/A-18에서 F-16으로 전환한 것은 부정이고, 평화의댐은 사기댐이라고 멍석말이를 했다. 람보총을 더 많이 쏠수록 그는 더 많은 박수를 받았다.
1993년 5월 13일 김영삼은 TV 생중계를 통해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12.12는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적인 사건이다…. 오늘의 정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 있는 문민정부다….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5.18정신 계승을 위한 성지화 사업을 돕겠다…. 그러나 진상 규명은 훗날 역사에 맡기자.” 이에 광주는 명예 회복은 반기면서도 진상규명을 후대에 미루는 것에 대해 들고 일어났다. “김영삼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약삭빠른 정승화가 재빠르게 나섰다. 1993년 7월19일, 그를 선두로 하는 예비역 장군 22명의 이름으로 전두환·노태우 등 12.12 사건 관련자 34명을 ‘반란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고소했다. 이에 자극받은 광주의 정동년 등이 나서서 5.18 관련자 전두환 등 17명에 대해 반란죄 및 내란죄 혐의로 고소를 했다.
1994.10.29. 검찰이 본 12.12
고소·고발이 있고부터 1년 3개월 10일 만인 1984년 10월29일 검찰은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12.12는 ‘군 형법상의 군사반란’ 사건으로 규정하면서 피고소·피고발인 38명 모두에 대해 반란죄를 인정했다. “12.12사건은 소장 군부세력의 리더인 전두환 전 합수본부장이 군권을 탈취하기 위해 치밀한 사전계획 하에 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승인 없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고, 병력을 불법 동원하여 군 지휘체계를 무력화시킨 명백한 군사 반란사건이다.”
이는 마치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취한 인수합병(M&A)이라는 정당한 기업 합병행위를 불법으로 해석한 검찰의 판단이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권력 남용으로 해석한 검찰의 판단과 유사한 것이었다. 이는 군 지휘체계에 대한 몰이해의 산물이었다. 검찰은 ‘정권의 개’라는 것이 정설이다. 문민 대통령이라는 위세 높은 권력이 쿠데타라 하니까 검찰도 쿠데타라 한 것이다.
그다음 김영삼의 개 노릇을 하려면 “진상 규명은 후대에 맡긴다”는 김영삼의 말을 정당화 시켜야만 했다. 그래서 검찰이 내놓은 어설픈 이론이 하나 탄생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38명 중 전두환 노태우 등 34명에 대해서는 14년 동안 국가 발전에 기여했고, 법정에 세울 경우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고, 공소시효가 지난 정호용 등 4명에 대해서는 “공소권 없음”의 결정을 내렸다.
서울지검 조준웅 1차장검사는 “12.12는 내란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당시 대통령 등 헌법 기관이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에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한 내란죄는 인정되지 않는다.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후세에 맡기고 관련자들에 대한 사업적 판단은 이번 검찰 결정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발표했다.
이 단계에서 독자들은 앞의 수사기록 상에 나타난 현상을 해석하는 데 있어, 독자와 검찰이 얼마나 머나먼 세상에 따로 살고 있는가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아래의 검찰 생각이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얼마나 다를까?
(1) 정승화와 전두환은 군 인사를 놓고 마찰을 빚어왔다(허위임). 정승화가 전두환을 한직으로 좌천시킬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허위). 이 소문을 들은 전두환이 하나회 등 소장 군부 세력의 입지를 보전하기 위해 12월11일부터 합수부와는 무관한 군수 차관보·일선 지휘관들과 하나회 장교들을 동원하여 정승화를 제거하기 위한 연행 계획을 모의했고 30경비단에 지휘소를 설치했다(엮어넣기).
(2) 30경비단은 12.12 사건의 지휘소였다(엮어넣기). 여기에서 대통령 재가를 집단으로 강요했다(허위). 핵심 지휘관들을 체포할 것을 결정했다(허위). 주요 거점들을 점령할 것을 결정했다(거점 없었음). 병력을 동원하여 정 총장을 제거했다(병력으로 체포한 것이 아니고 수사팀이 체포). 군의 주도권을 장악했다(군 주도권 장악 사실 없음). 9시30분 전두환·유학성·차규헌·황영시·박희도·백윤택이 총리공관에 무단 잠입하여 재가를 강요했다(허위).
(3) 장태완 정병주 등 반대 세력을 요정으로 유인하여 병력 출동을 방해하려 했다(허위).
(4) 대통령 재가없이 실력 행사로 총장을 연행했다(허위).
(5) 연행 위치에 있지 않은 허삼수·성찬옥 등이 연행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했다(국가 자원은 누구든지 활용할 수 있다).
(6) 정 총장에 M16을 들이대고 협박했다(사실).
(7) 총리공관을 경비하던 육군 헌병을 밀어내고 청와대 경호실 병력으로 총리공관을 점령하고 출입자를 통제하여 대통령과 외부인사 사이의 접촉을 차단했다(헌병은 헌병감 이진기의 명령을 따른다. 이진기는 대통령을 체포하려고 총리공관을 실제로 압사했다. 대통령 경호는 경호실이 하게 돼 있다. 지금은 경비가 없는가? 지금은 대통령은 외부인이 접근하여 만날 수 있는가? 검찰의 세계가 저잣거리 수준).
(8) 우경윤을 쏜 사람은 정승화의 아들이 아니라 연행 후 수사관들 사이에 발생한 오인 사격이었다(말 자체가 성립 안됨).
(9) 대통령이 재가하기를 거부했는데도 심야에 지휘계통에 있지 않은 장성들이 집단으로 쳐들어가 대통령에게 재가를 강요했다(뒤집어 씌우기).
(10) 노재현 장관을 체포하여 국방장관실로 강제연행하고 국무총리 승용차에 합승하여 대통령에게 가는 노재현 장관을 무장병력으로 강제 하차시켜 보안사로 연행한 후 집단으로 결재를 요구했다(뒤집어 씌우기).
(11) 병력을 동원하여 주요 지휘관들을 일시에 체포하고 중앙청·국방부·육본·수경사 등 주요 거점들을 점령했다(점령해서 어떻게 사용했다는 건가?).
(12) 대통령이 사후 재가도 하기 전에 이희성에게 육군참모총장직을 제의했고, 참모총장이 된 이희성으로 하여금 전두환이 원하는 대로 인사발령 하도록 했다(뒤집어씌우기).
위 검찰 발표에서 또 짚을 내용이 있다. 검찰은 정승화가 ‘내란 방조 행위’를 했는지에 대한 수사는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정승화가 쿠데타보다 더 위중한 내란 방조죄를 했다는 사실이 인정되면, 위 12가지 검찰의 판단은 무효다.
검찰은 정승화에게 아무런 죄가 없는데 전두환이 묶어갔다고 판단한 것이다. 세상에 이런 검찰이 다 있을까? 단지 검찰은 정승화가 내란방조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만 언급했다. 이 언급이 정승화의 유죄를 전제로 12.12를 판단했다는 것인지, 죄가 없는 정승화를 체포했다는 것인지 매우 애매하다. 정승화가 내란방조범인데, 내란방조범을 체포한 것이 쿠데타다? 국가의 정체성이 달려 있는 문제를 이렇게 멋대로 한다면, 그동안 일반 국민은 검찰로부터 얼마나 억울한 눈물을 많이 흘리면서 살아왔을까? 더구나 윤석열과 한동훈 같이 거물이 된 검사들도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이재용 삼성회장을 억울하게 옥살이시킨 마당이니 검찰 무서워서 세상 살겠는가?
여기에서 또 검찰은 12.12는 내란이 아니며 12.12와 5.18은 상호연관성이 없는 ‘별개의 사건’이라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바로 이 검찰이 1년 후에 개시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는 이 주장을 뒤집었다. 1979년 12월12일부터 계엄이 해제된 1981년 1월24일까지 14개월 동안 꾸준하게 전두환이 내란을 했고, 12.12 자체가 내란이라고 했다. 이때의 법은 법이 아니라 마음대로 우그려도 되는 양철 깡통이었다.
검찰의 이 수사 결과 발표 그 다음날인 1994년 10월30일 서울지검 조준웅 1차장 검사 및 수사 주임검사 장윤석 공안1부장검사는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1994년 검찰 판단과 1996년 재판 당시의 검찰 입장이 180도 달라진 것이 확인된다.
(문/조선일보) : 12.12에서 5.17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볼 때 내란죄를 적용할 수는 없었나?
(답) 12.12를 일으킬 때부터 정권 탈취의 목적이 있었다고 볼 증거가 없었다. 5.17과 국보위 구성은 12.12 한참 이후에 발생한 일이어서 같은 범주에 넣어 판단할 수 없었다.
(문) 12.12 직후 대통령의 권한이 무력화되고 정부가 식물 허수아비로 전략했는데도 정권 탈취 목적이 없다고 볼 수 있나?
(답) 이번 수사의 핵심은 12.12다. 그 이후의 상황은 별개로 판단할 문제다. 12.12 당시에는 국헌문란(내란)의 목적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문) 김영삼 대통령이 이미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듯이, 검찰의 처리 결과도 이미 이렇게 예정돼 있었던 것 아닌가?
(답) 대통령 발언에 대한 정치적 고려는 없었다. 일반 국민의 정서와 법 감정 등을 고려, 최대공약수로 도출한 것이다(국민정서법이라는 뜻).
(문)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의 박 대통령 시해방조협의에 대해서도 검찰이 무혐의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나?
(답) 정씨는 이미 그 부분에 대해 법원의 확정판결까지 받은 상태다. 이번 수사는 12.12가 반란죄에 해당하는 가에 대해서만 했다. 정씨의 시해방조 협의는 이번 수사 대상이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1994년의 검찰은 12.12를 쿠데타로까지만 인정했고, 1996년 검찰은 12.12를 내란 행위로까지 확대한 것이다. 이것이 1996년 김영삼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1995년 7월18일, 검찰이 본 5.18
1994년 5월13일, 광주의 여러 단체 소속 322명이 전두환·노태우 등 광주에 갔던 대대장급 이상의 장교 34명을 상대로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혐의로 서울 지검에 고발했다. 고소장이 접수된 지 1년2개월만인 1995년 7월18일, 서울지검 공안 1부 장원석 부장검사는 58명 전원에 대해 ‘공소권 없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1) 피의자들이 취한 5.18 진압 등 일련의 조치와 행위는 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2)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직 사실, 비상계엄 확대 사실, 광주 시위진압, 국보위 설치, 최규하 대통령 하야 등을 새 정권 창출을 위한 고도의 정치 행위이다. 이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다.
(3)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대법원 판결이 확정됐기 때문에 다시 논단하기 어렵다.
12.12는 범법행위이기는 해도 성공한 쿠데타이기 때문에 기소하지는 않겠다는 것이고, 5.18 진압 행위는 사법 판단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승화 그룹은 ‘기소유예’ 조치에 대해 반발하여 항고와 재항고를 했지만 기각당했다. 기각당하자 1994년 11월24일 헌법소원을 제출했지만 이 역시 기각당했다. 결국 12.12는 기소유예가 되었고, 5.18은 사법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으로 말끔히 정리가 됐다. 그리고 세상은 12.12와 5.18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이 평화는 9개월 동안만 지속됐다.
역사의 병균 노태우
칠칠맞은 노태우, 노태우가 모든 걸 망쳤다. 1995년 10월19일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비자금 4000억 원을 폭로했다. 4000억! 국민은 경악했다.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이 하늘을 찔렀다. 민주화 세력에 대한 더 없는 호기였다. 이런 호기를 김대중이 놓칠 리 없었다. 1995년 10월25일부터 1주일 여정으로 중국 영빈관(조어대)에 가 있던 김대중이 27일 자기는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이에 국민은 일시적으로 ‘김대중이 20억만 받았겠느냐’ 이렇게 생각했다가 단 하루 만에 김영삼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적인 김대중이 20억 원씩이나 받았다면 노태우 밥상에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얼마를 받았느냐, 몇 천 억은 될 것이 아니겠느냐?” 김영삼이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사실 훗날 노태우가 회고록에 밝혔지만 김영삼은 노태우로부터 이미 3000억 원을 받아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양심도 없이 그는 위기에서 살아남는 승부수를 썼다.
“노태우·전두환 저놈들 12.12로 쿠데타해서 정권 잡아가지고 광주의 무고한 국민을 학살한 놈들이다. 잡아넣어라”하고 일갈했다. 이 말에 국민의 시선은 김영삼에서 노태우와 전두환으로 다시 옮겨갔다. 승기를 잡은 김영삼은 1995년 11월16일 노태우를 2358억9600만 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전격 수감시키고, 11월24일 5.18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지시했다. 11월30일 이를 위한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됐다. 12월3일엔 전두환을 그의 고향인 합천에서 새벽에 검거하여 한양교도소에 수감시켰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김영삼이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하기 위해 사용된 소모품이 된 것이다. 법 집행이 아니라 모래바닥 씨름판 싸움이었다.
수감 하루 전인 1995년 12월2일 오전 9시, 전두환은 연희동 자택 앞에서 소위 ‘골목성명’을 발표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지금 이 나라가 과연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채 심히 비통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기억하고 있는 대로 현재 김영삼 정권은 제5공화국의 집권당이던 민정당·신민주공화당·통일민주당 3당이 과거사를 모두 포용하는 취지에서 연합해 ‘구국의 일념’이라고까지 표현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취임 후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 와서 김 대통령은 갑자기 저를 내란의 수괴라 지목해 과거 역사를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국가의 헌정질서를 문란케 한 범죄자라면 이러한 내란세력과 야합해 온 김 대통령 자신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곧장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내려갔다. 검찰은 그날 밤 11시20분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12월3일 새벽 5시57분, 그의 5촌 조카집에서 잠들어 있던 전두환을 깨워 연행했다.
수사관들이 고향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TV로 생중계되었다. 전두환은 세수를 하느라 몇 분간의 시간을 지체했다. 이 얼마 안되는 시간을 경찰청장이 기다리지 못해 검찰수뇌부로 전화를 했다. “왜 빨리 안 나오는 겁니까? 어른이 보시면 저한테 날벼락이 떨어집니다.” 김영삼을 극도로 의식한 것이다. 남총련(전라남도 대학생총연합회) 소속 체포결사대가 합천으로 가고 있었다. 경찰청장의 전화가 끝난 5분 후 전두환이 방에서 나왔다. 이때 검찰수뇌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두환이 밖으로 나오자 마당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고향 주민들이 “각하, 안됩니다”하고 울부짖었다.
이런 주민들 앞에서 수사관들은 TV 화면에 비치게 하려고 팔짱을 끼었다. 팔짱을 끼지 않아도 전두환은 조용히 갈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수사관들이 굳이 이런 과도한 모션을 쓰는 것은 김영삼이 TV를 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영삼에 이런 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경찰청장의 점수가 올라갈 것이라는 아부였다.
동이 트기 전인 6시37분 전두환은 검찰 승용차를 탔다. 고속도로에서는 버스전용 차도로 시속 100km가 훨씬 넘는 속도로 달렸다. 전두환은 소변을 호소했다. 수사관들이 깡통을 내밀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에 오줌을~.” 휴게소를 패스했다. 전직 대통령은 양쪽에 수사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줌을 눌 수 없었다. 10시37분 정확히 4시간 만에 안양교도소에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갔다.
검찰과 경찰은 인간들이 아니었다. 김기수 검찰총장의 ‘즉시구속’ 명령은 곧 김영삼의 명령이었다. 조상에 성묘하러 갔던 전두환은 성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끌려왔다. 품위를 중시하던 사회가 저잣거리 막돼먹은 저질 사회로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전두환의 품위와 김영삼의 품위와 검사들 품위
세상에는 두 가지 리더가 존재한다. 하나는 공식적 리더(formal leader)이고 다른 하나는 비공식적 리더(informal leader)이다. 공식적 리더는 법률적 직책이 있는 리더이고, 비공식 리더는 이른바 무관의 리더(uncrowned leader), 관이 없는 리더다. 계급이나 직급이 낮아도 윗사람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풀거나 남이 귀찮아하는 일을 찾아서 꾸준히 하는 사람은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고 따름을 받는다.
이것이 관이 없는 무관의 리더, 비공식 리더인 것이다. 당시 전두환은 2성 장군이었지만 칠흑의 밤에 침투한 김신조 특공조 33명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잡아 박정희 대통령을 보호했고, 제1차로 땅굴을 발견하여 제2·제3·제4차의 땅굴을 발견케 하는 동기를 부여했고, 모두가 겁을 내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감히 체포했고, 김재규를 옹호하는 정승화를 체포했고, 국보위를 설치하여 시국수습 정책을 개발케 하는 동시에 삼청교육대를 설치하여 기승을 부리던 사회악을 뿌리뽑고 있었다.
이러했기에 전두환은 공식적으로는 2성 장군에 불과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많은 존경과 따름을 받고 있었다. 김영삼이나 법조인들은 이런 경영학적 리더십 이론을 공부하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돼지’만 보이는 ‘돼지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본 것이다. 도대체 인생 내공이 없는 김영삼과 그를 추종하는 검찰과 판사들은 무엇을 돼지로 평가했는가?
12.12 밤 최규하 대통령과 함께 한 공간에서 밤을 새웠던 신현확 국무총리는 1996년 7월1일에 제18회 공판정에 증인으로 나와, 그날 밤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한 5명의 장군은 대통령 앞에서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 건의한 후 돌아갔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장군들이 대통령을 위압하고 공포감을 주었다고 써져있다. 신현확은 대통령과 함께 있는 동안 대통령이나 본인이나 공관을 지키는 무장병력의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는데도 판사들은 대통령이 무장병력에 겁에 질려 재가를 했다고 판결했다.
국방장관 노재현은 국방부청사 1층 계단 밑에 숨어 있었고, 신현확 총리가 국방부로 와서 국방장관을 찾으라 구내방송을 시키고 병력을 풀어 청사를 뒤져서 찾아내라 명했다. 이에 병사들이 계단 밑에 숨어있는 노재현을 발견하여 “누구얏!”하고 소리치니까 “나 장관이다”하여, 병사들이 경례를 하고 2층 장관실로 안내한 사실을 놓고, 판사들은 병사들이 장관을 장관실로 압송했다고 판결했다. 장관실로 압송했다면 장관실에서 무슨 압박을 가했다는 말인가? “총장을 원위치시켜라”는 윤성민 참모차장의 무모한 헛소리를 무시한 것도 명령거부죄가 된다고 판결했다.
당시 경복궁에 있던 장교들은 부대를 떠나 있었기에 너나없이 부대에 전화를 걸어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부대관리를 잘하고 있으라 당부했다. 이는 부대장들의 생리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를 놓고 판사들은 장군들이 부대에 전화를 해 출동 준비 명령을 내려 쿠데타에 동참시켰다고 덮어씌웠다.
경복궁에 모인 장군은 9명인데 9개 부대가 모두 쿠데타에 동원됐다는 것인가? 경복궁에 모였던 장군은 9명, 그중 3명만 하나회였다. 그런데 판사들은 하나회가 12.12를 주도했다고 판결했다. 전두환과 이학봉은 직속상관·직속부하 관계였다. 그런데 판사들은 이학봉이 건의하고, 전두환이 서명한 것을 놓고 두 사람이 공모했다고 판결했다.
전두환이 이학봉에게 정승화를 체포하라 한 날짜가 12.12인 것은 그날 군의 잔칫날이라 할 수 있는 장군 심사가 있는 날이라 그 이전에 체포하면 장군심사 행사가 깨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빠른 체포일이 12.12 밤 장군 진급 행사가 끝난 시점이었다. 12.12 밤에 체포한다는 명령을 전두환이 이학봉에게 내린 날은 12월6일이었다.
정승화가 골프를 치면서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전두환을 동해안 사령관으로 발령냅시다”라고 제안한 날짜는 12월9일이었다. 이를 놓고 판사들은 전두환이 경질 소문을 들고 경질될 것을 염려해서 선수를 쳐서 12.12 밤에 정승화를 체포했다고 판결했다. 검사들의 조사실에서나 법정에서 빼놓지 않고 묻는 질문은 “그때 권총을 차고 있었느냐?”는 질문이었다. 검사가 아니라 눈이 동그란 ‘아이들’이었다.
1980년 8월16일은 대통령 최규하가 사임한 날이었다. 그 하루 전인 8월15일 장관들이 모여 최규하 대통령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이에 대해 검사가 주영복 당시 국방장관에게 물었다.
검사: “8월15일 대통령을 보았을 때 대통령의 한쪽 눈인 자리가 부어있었지요?”
주영복 : “네.”
전두환의 주먹에 맞아 대통령직을 사임했다는 뜻이었다. 법정신문에서 검사는 전두환에게 또 다른 질문을 했다.
1996년 4월22일 1심 제5회 공판정에 전두환이 장장 6시간 정도에 걸쳐 신문을 받았다. 검사 김상희는 전두환에게 아무런 증거도 없이, 제대로 된 국민이라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야말로 추악한 신문을 했다. 국가원수에 대한 명예와 국가에 대한 엄중한 존엄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땅바닥에 놓고 발로 짓밟은 것이다.
김상희 검사: 최근 일부에서는 최규하 대통령의 대통령직 사임에 관련해서 피고인이 최 대통령에게 세 차례에 걸쳐 175억 원을 주었다는 주장이 대두됐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에게 그러한 돈을 준 사실이 있습니까?
전두환: 주고 안 주고 간에 그것은 최 대통령에 대한 모독이고 본인에 대한 모독이고, 또한 이것은 우리 국민에 대한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대한민국 대통령을 돈을 주고 살 수도 있고, 돈을 받고 팔 수도 있고, 이런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나라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검찰이 확실한 증거를 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국민의 수치감을 해소시킬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김상희 검사: 그러니까 175억 원을 준 사실이 없다 이런 말씀이지요?
전두환: 물론이지요.
김상희: 피고인은 혹시 조명작전이라는 말을 들은 사실이 있습니까?
전두환: 오늘 처음 듣습니다.
김상희: 최규하 대통령에게 돈을 건네주고 그 일부의 돈에 대해서는 최광수 비서실장이 작성해준 영수증까지 받았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있는데 혹시 그런 소문이나 주장을 들은 사실이 있습니까?
전두환: 글쎄 그 증거를 제시해 주어야 되지 않느냐 이겁니다.
검사: 그런 사실이 없다는 것이지요?
전두환: 있을 수가 없지요.
검사: 그러면 액수는 불문하고 어떤 형태로든지 최규하 대통령에게 하야 위로금 명복으로 돈을 건네 준 사실은 있나요?
전두환: 없습니다.
이양우 변호인: 재판장님, 지금 검찰은 우리나라 역대 국가원수에 대한 중대한 모독을 하고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대통령직 인수인계를 둘러싸고 돈을 주고받고, 그것이 특히나 대통령의 인계에 연관된 돈의 수수다, 이것이 과연 증거도 없이 이 공개된 법정에서 국가기관인 검찰이 얘기할 수 있는 것인지 검찰이 이런 질의를 하는 저의를 명백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비단 피고인에 대한 모독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에 대한 모독입니다.
재판장 김영일, 변호인에게: 언성을 낮추십시오. 너무 언성이 높습니다.
재판장 김희상, 검사에게: 첫 번 질문에 175억 원을 준 사실이 있는가를 물었을 때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무슨 기억을 더듬어 가지고 해야 될 그런 문제도 아니니까 거기서 질문과 답변은 끝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이상은 질문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바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질적 수준 그리고 난잡성이 웅변적으로 배어있다고 생각한다.
법은 모든 사람이 영악한 악인이라는 전제를 깔고 제정됐다. 20세 전후의 나이는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나이다. 이 시기에 양서를 읽으면 인격이 고양되지만 이때 성악설을 읽으면 인격이 망가진다. 젊은 나이에 고시에 합격했다는 사실은 수재가 아니라 인격 파탄자일 수도 있다. 두뇌와 인격은 완전 별개다. 젊은 고시 합격자, 가장 위험한 존재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이러한 가설이 전두환 재판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입증이 된 것이다.
5.18특별법
모든 법 집행기관과 헌법재판소는 오로지 김영삼의 발언에 꿰맞춰 법을 가지고 장난질을 쳤다. 김영삼이 “12.12는 쿠데타적 사건이지만 진실 규명은 역사에 맡긴다”고 하자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15년이 지났으므로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다. 그런데 이제 김영삼의 발언이 180도 바뀌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등 모든 피고발자를 다 처벌하라고 발언한 것이다.
이에 검찰은 우선 모든 관련자들을 구속부터 시켜놓았고, 정치권은 구속과 처벌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군사반란(쿠데타)죄의 공소시효는 15년이다. 이 법에 의하면 전두환 등에 대한 구속은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불법이었다. 그래서 민자당이 앞장서서 공소시효를 없애는 5.18특별법을 발의 통과시킨 것이다. 1995년 12월21일이었다.
전두환 측이 ‘위헌법률 심판청구’를 제기했다. 특별법이 ‘소급입법’ 즉 나중에 제정된 법으로 이전의 사건을 심판하는 위헌법이라는 것이었다. 5.18특별법은 누가 봐도 위헌이었다. 로비를 하고 압력을 넣고 별 위법적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헌법재판관 5명은 위헌에, 4명은 합헌에 투표했다. 위헌이라는 판단이 우세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6:3이 되어야 위헌으로 결정되게 돼 있다. 5.18특별법은 사실상 위헌적인 법률이지만, 이 하나의 법으로 전두환에게 내란죄를 씌웠고, 재심 절차 없이 1981년 1월23일 대법원이 내린 5.18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모두가 불법 편법이었다.
1981년의 대법원은 ‘기존의 법률’에 따라 김대중에게 내란 음모죄를 선고했고, 이에 따라 5.18은 반국가폭동으로 규정됐다. 하지만 1997년의 대법원은 전두환을 처벌하기 위해 새로 법을 만들어 소급 적용을 하여 전두환을 내란죄로 처벌했다. 완전한 위헌이었다. 이러한 처벌을 하기 위해서는 5.18을 폭동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바꾸어 놓아야 했다. 내란죄가 성립하려면 5.18이 반드시 민주화운동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5.18이 민주화운동이었는가, 폭동이었는가? 1990년 1월 3당 합당 이전까지 5.18은 폭동이었고, 폭동이라는 것은 1981년 1월23일 대법원이 공식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그 ‘폭등’은 김영삼과 노태우가 민주화운동으로 이름을 바꾸자고 합의해서 정치인들끼리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바꾼 것이다. 그리고 1997년의 대법원은 5.18이 민주화운동인데 이를 전두환이 주도해서 탄압했기 때문에 전두환이 내란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법이 아니라 짐승 잡는 올가미였다.
‘5.18특별법제정기초위원회’ 의장인 현경대 민자당 의원의 사회로 ‘헌정질서 파괴범죄의공소시효등에관한특별법’이 확정됐다. 헌정질서 파괴 범죄는 ‘내란외환의 죄’ ‘반란이직죄’로 처벌하고 앞으로 이 범죄를 범한 자에게는 ‘대통령 재직기간 중 공소시효’를 정지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2.12·5.17·5.18에 대해서는 “1979년 12월12일부터 1993년 2월24일(6공의 종결시점)까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본다”고 규정했다. 1995년 12월6일에 국회가 제정하고 12월21일 시행된 이 법의 효력은 1995년 12월21일 이후에 발생한 범죄에 대해서만 적용돼야 한다.
그런데 김영삼법은 1995년에 제정된 법으로 16년 전인 1979년에 발생한 사건에 대해 소급 적용한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이를 합헌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두 법을 자의적으로 만들고,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위헌의 범죄를 저질러가면서 일사천리로 형을 집행한 것이 바로 김영삼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었다.
더구나 전두환은 5.18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업무도 아니었고 그가 진압에 관계하지도 않았고, 그가 광주에 간 적도 없다. 전두환이 사건 이후에 대통령을 하지 않았으면 전두환은 5.18과 아무 관계도 없었던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됐을 것이다. 공산 독재의 나라 말고 이 세상에 이렇게 황당하게 날벼락을 맞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이 모든 것은 오로지 김영삼이 노태우로부터 3000억 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은폐시키기 위해 벌인 김영삼의 람보춤에 불과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5․18특별법은 헌법이 규정한 ‘일사부재리의 원칙’과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분명히 위반했다. 이를 부정한 법조인은 없을 것이다.
‘위헌의 5․18특별법’, 이 법은 전두환 등 공소시효가 다 지난 사람들을 기소 대상으로 잡아넣는 데까지만 유효했다. 기소는 했지만 전두환 등에 뒤집어씌울 죄를 만들어 내야 했다. 죄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김영삼이 거꾸로 감옥에 가야 할 판이었다. 5․18을 따로 떼어 다시 재판할 수도 없었다. 5․18을 다시 재판하려면 재심절차가 필요했다. 그런데 김영삼은 재심절차를 회피해서 5․18을 다시 재판했다. 이 역시 일사부재리 원칙을 위반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두환 등에 뒤집어씌울 죄를 창조해 내는 것이었다.
‘김영삼의 개’로 널리 회자된 권영해, 그는 홍준표를 데려다 공작을 시켰다. 전두환은 양심적인 애국심으로 시국을 멋지게 수습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대통령을 하려는 욕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전두환이 ‘집권시나리오’ 즉 집권을 하기 위한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부각시켜 ‘법몰이’와 ‘여론몰이’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권영해는 그의 육사 15기 동기생인 권정달을 포섭해 ‘전두환의 집권 시나리오’를 창작해 냈다. 1996년 1월4일 검사는 권정달을 검찰청이 아닌 삼정호텔 1110호실로 불러 25만 자의 드라마 시나리오를 창작했다. 아마도 검사와 홍준표와 권정달이 함께했을 것이다. 이 집권 시나리오는 12․12와 5․17과 5․18 모두를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저지른 내란행위인 것으로 몰고 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권영해·홍준표·권정달·검찰이 창작한 집권 시나리오
당시 ‘보안사 핵심 5인방’으로 회자됐던 사람은 권정달·정도영·허삼수·허화평·이학봉이었다. 이 5인방의 핵심 좌장인 권정달이 배신을 때린 것이다. 삼정호텔 1110호에서 홍준표·검찰·권정달이 창조해낸 25만 자의 집권 시나리오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1980년 2월에 구성한 언론대책반의 반장은 이상재 준위였는데 그는 나의 직속 부하였지만 보안사 인사처장인 허삼수가 추천했고, 모든 사항은 나에게 보고하기 전에 허삼수·허화평·이학봉·정도영에게 먼저 했다. 그가 “K-공작계획을 수립한 것에 대해서도 내가 보고를 받았고, 전두환에게도 내가 보고한 것이 사실이지만 입안과 시행 과정에서 나는 껍데기였고 모두 다 보안사 핵심 인물들이 주도했다.
2) K-공작을 시행한 목적은 전두환 등 핵심세력이 반대여론을 무마하고 언론을 조종·통제·회유하려는 데 있었다. 여야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구태의연한 정치작태로 부각시키고, 최규하 대통령에 대해서는 무력한 허수아비요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부각하여 여론을 조작했다.
3)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탐낸 것은 전두환이 사회적 인물들을 많이 만나는데 필요한 격려금 등의 거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정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예산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4) 시국수습방안을 작성한 주무부서장은 나였다. 1980년 5월 초 전두환으로부터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해 보라는 지시를 받고 내가 지휘하는 정보처 산하에 4~5명으로 구성된 정세분석반을 활용하여 문안작성 작업을 시작했다.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후 2~3일간 보안사 핵심들(허화평·허삼수·정도영·이학봉)과 함께 비서실장실 허화평의 조그만 회의실에서 비상계엄전국확대·국회해산·국보위 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시국수습방안 초안을 완성했고, 허화평과 허삼수는 내각이 매우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내각을 강력히 조종 통제하기 위해서는 국보위가 필요하다고 제의했다. 또한 군부가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지역계엄보다는 전국계엄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했다.
5) 신군부는 국회가 계엄 해제를 의결할 것이 겁이 나서 국회 해산과 정치인 연행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했다.
6)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초안은 보안사 핵심 참모 5명이 작성했고, 신군부 핵심세력(정호용·유학성·황영시·차규헌·노태우 등)이 수시로 만나 긴밀히 협의했다. 이들을 부른 사람은 허화평 비서실장이었다. 이들은 수습 방안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시국수습방안은 수립단계부터 전두환 등 신군부가 전면에 나서서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형식상으로는 내가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하는 실무자 역할을 담당하긴 했지만 실질은 신군부가 주도한 것이었다.
7) 5월17일 밤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심의할 때 중앙청 현관에서 회의장까지 1m 간격으로 병사들을 배치함으로써 국무위원들은 찬성하고 싶지 않았음에도 군부가 두려워 찬성했을 것으로 본다.
8) 당시는 비상계엄 해제·전두환 퇴진을 원하는 국민적 시위가 격화되고 있었다. 시국수습방안을 실천하게 되면 국민의 대대적인 반발과 저항이 예상됐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시국수습방안의 수립 및 준비 단계에서부터 무자비한 진압을 계획하고 있었다. “과감히 타격하라, 끝까지 추격 검거하라, 분할 점령하라”는 공수부대들의 시위진압 지침을 전제로 하여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이다.
이상의 소설은 같은 육사 15기 동기생인 권정달과 권영해 현역 안기부장이 모의 창작했고, 홍준표와 검찰과 권정달이 삼정호텔 1110호실에서 25만 자로 문서화한 것이었다. 공식조사 장소가 아닌 삼정호텔에서 5회에 걸쳐 작성한 이 문서는 그 절차와 형식에 있어 분명한 사문서에 속하지 공문서가 될 수 없다. ‘모의문서’인 것이다. 그리고 이 문서 내용 그대로 전두환 등이 법원에서 단죄되었다. 1997년 4월17일 발행된 대법원 판결문은 100% 위 ‘모의된 사문서’ 그대로를 반영한 ‘권정달 문서’에 불과했다.
권정달과 신군부의 법정공방
권정달은 5공세력에 대한 이른바 배신자의 모습으로 1996년 7월22일 1심 제23회 공판정에 증인으로 나왔다. 권정달은 자유의 몸으로 증언대에 섰고, 그와 함께 5공을 주도했던 동지들은 수의를 입고 있었다.
변호인 김현무(유학성을 위한 변호인): 증인이 시국수습방안을 만들어 보안사 참모 5명과 유학성·황영시·차규헌·노태우·정호용 등 이른바 신군부 핵심세력과 함께 토의한 날자가 5월4일 전후라고 했지요?
증인(권정달): 예
문: 군의 관례나 예의상 4성 장군들을 전두환 사령관이 부른 것도 아니고 대령에 불과한 허화평이 부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요?
답: 당시 상황은 계급이나 관례를 가지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비서실장인 허화평이 상의할 게 있다고 오라 하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변호인 정영일(황영시 변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변을 당했고, 통치권이 확립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학생시위와 노사분규가 끊이지 않아 비상계엄은 물계엄이다 종이호랑이다 하는 식으로 비하됐고, 5월에 들어서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폭력의 규모나 양상이 위기를 실감케 했고, 구호도 정치구호로 변질되었고, 북한의 동향도 심상치 않은 상태에서 최규하 정부는 과도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다 내각 역시 소극적인 역할만 수행해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정국을 장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나요?
증인(권정달): 예.
문: 보안사의 시국관도 이러했나요?
답: 예, 그렇습니다.
문: 증인이 작성한 시국수습방안은 바로 이에 대한 대책 방안이며, 이를 최 대통령에게 건의하였지요?
답: 예.
문: 국가적 위기를 맞아 국가보위를 책임지는 보안사가 나름대로의 대책을 만들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답: 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더구나 전두환 피고인은 보안사령관일 뿐만 아니라 중앙정보부장 서리까지 겸임을 하고 있었기에 국가적 난국에 대해 나름대로 무슨 대책을 내놓아야 마땅한 것 아닌가요?
답: 시국을 수습해야 할 입장에 있었습니다.
문: 증인은 보안사에 얼마나 근무했나요?
답: 20여 년 될 것입니다.
문: 그래서 아실 터인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도 시국이 어려울 때마다 보안사가 나름대로의 시국수습대책을 연구해 가지고 대통령에 건의하지 않았나요?
답: 그랬습니다.
문: 증인이 만든 시국수습방안도 바로 이런 차원의 일이 아니었나요?
답: 예.
문: 결론적으로 시국수습방안을 만들 때는 몰랐는데 시국수습을 해나가다 보니까 결과론적으로 전두환 피고인이 집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말인가요?
답: 예.
문: 그렇다면 시국수습방안은 만들 당시 집권계획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는 것인가요?
답: 꼭 집권하겠다고 만든 것은 아닙니다.
문: 전두환 피고인이 증인에게 시국수습방안을 만들어 보라 지시할 때 구체적인 내용까지 지시했나요?
답: 아닙니다.
문: 그러면 구체적인 내용은 증인의 주도 하에 만든 것이군요?
답: 예.
문: 시국수습방안에 따라 실제로 국회가 해산이 됐나요?
답: 국회는 해산되지 않았습니다.
답: 아까 증언하시기를 시국수습방안은 집권계획도 아니고, 또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서 실시한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내란의 마스터플랜이라는 것인가요?
검사 김상희: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법리해석이나 의견에 대한 신문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은 없었던 것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 검찰은 증인이 만든 시국수습방안을 내란의 마스터플랜으로 보고 있는데 증인은 어떻게 보시나요?
답: 제가 답변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검찰 기소대로라면 시국수습방안이 내란의 마스터플랜이라 한다면 증인의 주장대로 5월4일 여러 분들을 모아놓고 증인이 브리핑한 것은 내란의 공모요 모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안을 만들고 브리핑한 증인이야말로 핵심 중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증인은 기소조차 안 되어 있고, 반대로 그날 브리핑을 받은 사람들만 구속되어 내란의 공범으로 재판받고 있는데 증인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답: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변호인 김순갑: 보안사의 핵심부서는 정보처·대공처·보안처이지요?
증인: 예.
문: 인사처·군수처 등은 지원부서이지요?
답: 예.
문: 증인은 정보처장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정보를 수집 분석하여 시국수습을 위한 대안을 만드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지요?
답: 예.
문: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특별히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정보처의 업무소관이 아닌가요?
답: 예.
문: 증인은 국보위 내무분과위원으로 임명되었었지요?
답: 예.
문: 임명되긴 했지만 고유의 업무가 너무 많다보니 내무분과위원으로서의 임무는 거의 수행하지 못했지요?
답: 예, 나가지 못했습니다.
피고인 허화평: 이런 자리에서 증인을 만나 질문하게 된 것을 서글프게 생각합니다. 증인께서는 10.26 이후에 보안사를 떠날 때까지 당시 전두환 사령관을 중심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국난 극복에 동참한 데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계실 줄로 압니다. 인정하시나요?
권정달: 예.
문: 그 당시 증인은 정보처장으로 그리고 국보위 문공분과위원의 직책을 가지고 언론통폐합이라는 어려운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정보처장을 그만 둔 다음에는 예편을 해서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민정당을 창당하고 11대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루에 냈습니다. 그 공으로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민정당 초대 사무총장이 되어 5공의 정당성을 주장했었지요?
답: 예.
문: 시국수습방안이라는 말은 검찰에서 처음 들어본 이야기입니다만 여튼 수습방안을 연구해보라는 지시는 증인 혼자 사령관실에 불려가 지시를 받은 것인가요?
답: 예. 사령관님이 말씀하시기를 사태가 어지러우니까 이를 수습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보라 하셨습니다.
문: 증인이 혼자 가서 지시를 받은 것이 맞지요?
답: 예.
문: 보안사 정보처는 정보 업무의 주무처입니다. 오랜 경험과 훈련을 쌓은 전문가들이 있고, 자체 존안자료가 방대하고, 중정이나 경찰로부터 자료를 얼마든지 입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료들을 가지고 전문요원들이 아이디어를 내서 대책안을 만들어 가지고 증인이 직접 사령관님께 보고한 것이 아닌가요?
답: 시국수습방안에 담긴 세 가지 문제는 실무적인 차원의 관계관들이 모여서 회합을 하는 방법으로 논의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전국비상계엄 같은 것은 다른 관계기관에게 노출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문: 그래서 묻겠습니다. 아까 이 자리에 계신 유학성·황영시·노태우·차규헌 피고인 등 당시 중요한 위치에 계신 분들을 모아놓고 사령관의 허락도 없이 비밀이 보장돼야만 하는 그런 문제를 이야기 했다는 것은 비밀보장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요?
답: 허화평 의원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그때에는 사령관님이 꼭 소집을 해서가 아니라 서로 통하는 입장이어서 가능했다고 믿습니다.
문: 결국 보안사 안에서 증인이 책임지고 있는 업무를 이웃에 있는 핵심참모들과 논의해서 사령관에게 보고를 했다 이런 얘기이군요?
답: 그렇습니다.
문: 책임을 회피하자는 말인가요?
답: 무슨 책임 회피입니까?
문: 검찰 공소장에 의하면 증인이 보안사 핵심참모인 이학봉·허화평·정도영·허삼수 그리고 증인 이렇게 다섯 사람이 비서실 대기실에서 2~3일간 모여가지고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을 만들어 사령관에 보고했다고 되어 있는 데 그게 사실입니까?
답: 사실입니다.
문: 그러면 사령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을 때 다섯 사람이 공동으로 연구해서 가져오라 이렇게 지시받았나요?
답: 지시를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다섯 사람은 언제나 의논하고 특히 비서실장과는 사령관실에 들어가기 전과 후에 늘 의논을 했습니다.
문: 10.26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정승화 씨와 같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 관련돼 있었습니다. 그 수사를 보안사 대공처 수사국이 맡고 있었습니다. 이 중요한 일에 증인은 참여한 일이 있나요?
답: 참여한 일 없습니다.
문: 그러면 거기에 보안처장이 참여했었나요?
답: 수사 사항과 일반적 정책 입안은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문: 12.12 사건은 모든 참모가 매달려 있었던 사항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건은 대공처 수사국이 아무도 모르게 비밀을 지키면서 처리했습니다. 하물며 국회를 해산한다, 비상기구를 만든다, 전국비상계엄을 선포한다, 정치인을 잡아가둔다 이런 사항들은 일반적인 사항이 아니고 고도의 정보적 감각을 가진 사람만의 사항들입니다. 이런 극도의 비밀을 요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과 의논을 하고 보안사 전체가 매달렸던 12.12 사건에 대해서는 정보처장이 참여를 하지 않았다? 모순된 말이 아닌가요? 보안사 업무는 차단의 원칙에 의해 수행됩니다. 자기 업무는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지 않는 것이 생명 같은 원칙입니다. 그런데 유독 증인께서만 증인이 해놓고도 ‘나 혼자 한 일’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함께했다?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답: 그것은 논리의 비약입니다. 분명히 다섯 사람이 상의해서 했습니다.
문: 비서실장실은 그야말로 남대문시장입니다. 증인은 저보다 2년 선배입니다. 보안처장은 1년 선배입니다. 정말 그런 중요한 업무를 함께 기획했다면 찾아오는 사람들로 와글거리는 비서실이 아니라 넓고 조용하고 보안이 유지되는 증인의 사무실이나 보안처장의 사무실에 가서 해야 하는 게 정상이 아닐까요?
답: 그것은 말씀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비서실장이 어떻게 자리를 비우고 다른 사무실에 갑니까?
문: 그러면 제가 선배 장교들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답: 그건 아닙니다만 당시 비서실장은 통제형 참모의 역할을 한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문: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 고위 장성 분들을 모아놓고 설명을 했다 이거지요?
답: 예.
문: 그분들을 누가 집합시킨 것입니까? 사령관 지시도 없었다, 비서실장이 했는지는 모르겠다, 증인도 안 했다 그러면 유령이 집합을 시켰나요?
답: 모임이 형성돼 있었고, 누군가가 저더러 나가서 설명을 하라 해서 설명을 했는데 저는 그 주도를 허화평 실장이 한 것이 아니겠느냐 생각한다고 검찰에 진술한 것입니다.
문: 제가 어째서 정보처장의 일을 위해 고위 장성들을 소집해 줍니까?
답: 그때 상황은 지금의 정상적인 상황과 다릅니다.
문: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런 모임은 없었습니다. 증인은 검찰에 5번 불려가 조사를 받았지요?
답: 예, 밤을 샐 때도 있었습니다.
문: 5차례의 검찰 조사를 통해 증인은 줄곧 사령관실 옆에 있는 접견실에서 그 모임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오전에 다시 생각해보니까 안가였다고 했습니다. 모임의 장소가 안가 맞습니까?
답: 안가가 맞습니다.
문: 브리핑을 할 때 차트도 들고 나갔고,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는 등의 세부 사실은 기억을 하시면서 그보다 훨씬 기억이 잘 돼야 할 모임의 장소는 어째서 기억이 흐린가요?
답: 기억이 안 난다 한 적이 없습니다.
문: 증인은 많은 착각을 하고 계십니다. 당시 중정의 안가는 증거보존지역이라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전두환 사령관께서는 그 끔찍하고 재수 없는 안가는 쳐다보기도 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령관님은 조선일보사 뒤에 있는 정동 안가를 사용하셨습니다. 또한 궁정동 안가는 중앙정보부 재산이라 보안사가 사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안가 역시 증거보존지역으로 접근이 금지돼 있었습니다.
답: 아닙니다. 시해장소인 안가와 시해 장소 옆에 있는 김재규가 사무실로 쓰던 안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문: 증인은 전두환 대통령을 받들어서 모든 임무를 불평 없이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고, 5.18특별법에 따라 수사가 시작될 당시 증인은 국회의원 출마를 앞두고 자세를 바꾼 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역사 앞에 부끄럼 없는 일했다는 자부심에 대해 언젠가는 말씀해 주실 것으로 믿겠습니다. 증인께서 전역을 하시고 창당 작업을 이종찬 당시 중앙정보부 총무국장과 함께 추진하신 것은 사실이지요?
답: 사실입니다.
문: 중간보고·결과보고 모두 증인이 책임을 지고했지요?
답: 보고를 했습니다.
문: 창당 작업은 성북동에 있는 보안사 안가에서 했지요?
답: 예.
문: 거기에 제가 가본 적이 있나요?
답: 거기에 어떻게 오겠습니까?
문: 그런데 증인은 무슨 근거로 정당의 조직책 선정을 허화평 청와대 비서실장 보좌관이 주도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나요?
답: 꼭 주관을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비서실장 보좌관실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이고 거기에서 하나씩 결정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문: 장소를 제공한 것은 제가 했습니다만 창당 작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증인이 주도했고, 그 결과 민정당 사무총장까지 한 것이 아닙니까? 창당을 주도한 사람은 뒤로 빠지고 비서실장의 임무에 따라 장소를 마련해준 사람이 창당을 주도했다는 것은 이상한 주장이 아닌가요?
답: 주도라기보다는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입니다.
피고인 유학성: 오늘 권정달 의원과 이렇게 대하고 보니 기구한 운명에 처한 우리가 더욱 슬퍼집니다. 우선 권정달 의원이 안동에서 당선된 것을 축하합니다. 80년 5월4일 중앙정보부 안가에 군사령관·참모차장·육사교장·특전사령관·수경사령관 등을 일개 대령이 보안사령관의 하락도 없이 집합시킬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증인 권정달: 소집이 아니라 좀 오셨으면 좋겠다 하는 건의 형식으로 모이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문: 5월4일은 일요일, 5월5일은 어린이날이었습니다. 나는 용인에서 3군사령관을 했습니다. 지휘관이 자기 지역을 뜰 때에는 육군참모총장의 승인을 얻어야 합니다. 나는 5월 3·4·5일 어간에 서울에 간 일도 없지만 안가가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국수습방안이라는 것은 구속되기 하루 전에 검찰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검찰에서 저는 권정달 의원과 대질시켜달라 했지만 검찰은 안 해주었습니다.
답: 저는 형님과 함께 황영시·차규헌 장군님 세 분이 참석하신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이 없습니다.
문: 3군사령과·참모차장·육사교장 등 고위 장성이 모여 있으면 당연히 보안사령관이 나와야지요. 그런데 대령이 이런 고위 장성들을 불러 의견을 모아가지고 그 결과를 보안사령관한테 보고를 한다? 이건 참으로 믿어지지가 않는데요?
답: 저는 모임이 있었고 보고를 드렸다고 확실하게 기억합니다.
피고인 정호용: 증인은 수습방안을 마련해서 대통령에게 좋은 건의를 올려야 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었지, 무슨 내란이다 또는 집권이다 하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것 아닙니까?
증인 권정달: 초기에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
문: 권 증인은 검찰에 이것이 집권 시나리오다, 또는 이것이 내란음모다 이런 증언을 하셨나요?
답: 그런 일 없습니다.
문: 증인은 대체방안이라든지 창당이라든지 헌법 개정이라든지 등등 여러 가지를 주도적으로 해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나하고 긴밀하게 의논을 한 적이 있나요?
답: 별로 기억이 없습니다.
문: 시국을 타개하기 위해 증인은 보안사령관의 브레인 역할을 했기에 여기에 당연히 우리와 함께 기소되어 있어야 할 사람으로 압니다. 그런데 증인은 증인이 책임지고 한 일에 대해 구차한 방법으로 여러 사람들을 끌어들여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게 내 솔직한 생각입니다. 5월4일 경에 회동을 했다는 증인의 주장에 대해 관련자들 모두가 모인 사실이 없다 하고, 비서실장도 연락한 바 없다고 하는데, 유독 증인 혼자서만 분명한 사실이라고 합니다. 인격 모독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증인은 증인이 책임지고 했던 일을 모두 남이 했다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 여기 계시는 분들께서는 당시 군 최고 지휘관들로서 군복을 입고 계셨으며 저 혼자만 군복을 벗고 창당을 주도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제가 어디에 앉아 있느냐(기소가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는 검찰과 재판부가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피고인 허삼수: 당시 선배인 증인이 후배들과 동격의 참모를 하시면서 인간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은 것이 있었습니까?
증인 권정달: 답변 드리기 거북하지만 조금 그런 감이 있었습니다.
문: 정보처에서 처리하신 제반 사항은 결과적으로 정보처장의 책임이지요?
답: 정보처가 한 것은 정보처장의 책임이겠지요.
그후 권정달은 국회의원 신분이 되어 1996년 10월24일 제2심 제5회 공판정에 증인으로 불려 나왔다.
변호인 이양우: 증인은 12.12사건 당시 보안사에 나와 26사단 포병사령과 이경희 대령, 수도기계화사단의 포병사령관 김도수 대령, 제2훈련소장 이필조 소장 등에 전화를 걸어 병력 출동을 말려달라고 권유한 사실이 있지요?
권정달: 예.
문: 그것은 보안사령관이 시켜서 한 일인가요?
답: 지시에 의해 한 것은 아닙니다.
문: 증인이 판단해서 한 것인가요?
답: 부대 간의 충돌이 있으면 안 되겠다 생각해서 스스로 한 것입니다.
문: 병력 출동 자제를 부탁하신 것은 군사반란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요?
답: 유혈극을 막아보자는 생각에서 한 일입니다.
문: 당시 증인은 정승화의 행동이 의혹을 살만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답: 참모총장으로서 문제가 많이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 5.17에 대해 묻겠습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보안사는 정보처 산하에 언론반을 두고 계엄사의 언론검열 업무를 지원합니다. 이는 3공화국 시절부터 죽 해오던 관행이 아니었나요?
답: 협조를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문: 그러면 언론반은 1980년에 처음 새로 만든 것이 아니고 비상계엄이 선포될 때마다 만드는 것이지요?
답: 정보처 2과에는 언론반이라는 게 원래 있었습니다. 여기에 이상재 반장이 와서 언론반이 더 강화됐다는 것입니다.
문: 신설한 것이 아니라 보강한 것이라 이 말입니까?
답: 예.
문: 증인은 1995년 5월23일의 검찰조사에서는 “언론반을 보강한 것은 시국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보도검열을 강화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5.18특별법이 제정되어 수사가 다시 진행되자 1996년 1월14일의 검찰조사 시에는 “군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전두환 피고인이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한 것”이라고 진술을 바꾸었습니다. 어느 것이 맞는가요?
답: 사실을 사실대로 펴놓고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문: 전두환 피고인께서 증인에게 군부의 개혁에 반대하는 언론계의 동향을 제거하고 정국 주도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나요?
답: 그런 지시는 없었습니다.
문: 이상재 씨는 증인으로부터 명령을 받을 때 언론계 중진을 만나 안보 중심의 시국관을 설명해주고 보도성향을 안정 위주로 유도하라는 지침을 받았다고 진술했는데요?
답: 시국이 안정되는 방향으로 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문: 이상재가 작성한 이른바 K-공작계획은 이상재가 독자적으로 만든 것인가요, 아니면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한 것인가요.
답: 사령관 님은 모르시고 그가 작성해 가지고 제게 가져와서 보고했습니다.
문: K-공작계획이라는 것은 이상재가 언론반장에 취임해 가지고 언론반의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업무계획에 불과하다고 하던데 맞는가요?
답: 사실입니다.
문: 증인은 이 K-공작계획서를 사령관에게 보고했나요?
답: 기억에 없습니다.
문: 증인은 전두환 피고인이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에게 중앙정부부장 서리를 하겠다고 말하고 다녔다”라고 진술한 사실이 있나요?
답: 기억이 안 납니다.
문: 증인은 대통령이 전두환 피고인을 중앙정부부장 서리에 임명한 경위도 모르고 전두환 피고인이 총리를 만난 사실도 모르면서 어떻게 해서 전두환 피고인이 대통령과 총리를 찾아가서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해달라고 자청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답: 그건 제가 모르는 일입니다.
문: 그럼 조서가 잘못되어 있는 것인가요?
답: 중앙정보부장 서리 임명에 대해서는 제가 모른다고 진술한 것으로 압니다.
문: 증인은 당일 조서에서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한 것은 돈이 필요하였고, 부총리급인 서리직을 겸직함으로써 각료급 대책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라고 진술했습니다. 이는 전두환 피고인으로부터 직접 들은 말인가요?
답: 제 주관적인 판단입니다.
한때 박철언 등 거물 정치인들을 줄줄이 구속시켰던 홍준표는 1994년에는 법무부 특수법령과라는 한직에 좌천돼 있다가 안기부장 권영해와 손을 잡으면서 김영삼의 사랑을 받게 됐다. 1994년 11월부터 공식적으로는 1995년 9월21일까지 안기부에 파견되어 권영해와 인연을 쌓았다. 김영삼은 권영해의 주군이었다. 김영삼을 살리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 ‘공작’이었고 ‘공작’은 국정원의 주특기요 생리다. ‘5․18특별법’도 ‘집권시나리오’도 다 공작이었고, 그 공작은 ‘법의 공작’이었다. 큰 공을 세운 홍준표는 1996년 초 김영삼의 부름을 받아 신한국당에 입당했고 그해 4월에 출마해 제15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시국수습방안’은 권정달이 보안사 정보처장 자격으로 전두환 사령관의 오더를 받고, 자체 내의 전문가들을 모아놓고 아이디어를 동원하여 만들었고, 자기 명의로 직접 보고를 한 사항인 데도, 이를 모두 전두환과 보안사 후배들의 작품이고, 그 작품은 그 자체가 ‘전두환의 집권시나리오’라고 모함했다. 이것이 모함이라는 사실은 그의 위 증인신문 과정에서 확실하게 드러났다.
그런데도 검찰과 판사들은 권정달 이름으로 창조된 ‘집권시나리오’ 100% 그대로를 전두환 등에게 뒤집어씌웠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검찰이고 대한민국의 판사들이다. 2024년 2월 초 뉴스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감옥에 넣었던 바로 그 출세한 검사들이 죄 없는 양승태 대법원장과 수십 명의 법관들, 그리고 대한민국 브랜드의 간판인 삼성그룹 이재용 회장을 무고하게 감옥에 넣고 재판에 시달리게 하여 사법체계를 흔들어놓고, 국가 경제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쳤다는 비난의 소리들이 소개 되었다.
국가는 온데간데 없고 자신들의 협소한 해석 능력을 가지고 법을 자기 출세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출세한 검사들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케 하는 대목이 바로 ‘집권시나리오’를 창조하여 전두환 등에게 뒤집어씌우고, 충신은 반역자로, 반역자는 충신으로 뒤바꾸어 놓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장면인 것이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1996년 3월11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장장 9시간 동안 제1심 1회 공판이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공개리에 열렸다. 입정한 피고인은 16명(전두환·노태우·유학성·황영시·이학봉·이희성·주영복·차규헌·정호용·허삼수·허화평·박준병·최세창·장세동·박종규·신윤희)이었다. 판사는 김영인·김용섭·황상현이었고, 재판장은 김영일이었다. 후에 헌법재판관도 했다. 검사는 채동욱·김상희·김진태(강원도지사 김진태가 아님) 등 8명이고, 변호인은 이양우·전상석·석진장·전창열 등 23명이었다.
전상석 변호인이 장문의 변론 요지를 읽어갔다. 유죄의 성격이 이미 굳어져 있는 검사들과 판사들이 너무 지루해했다. 검사들과 재판장이 자꾸만 끼어들어 ‘내용을 축약하여 빨리 끝내라고 독촉을 했지만 그는 끝까지 변론서를 낭독했다. 변호인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자체가 법률적으로 부당하다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했다. 5공화국이 내란정권이면 그 뒤를 이은 모든 정권의 정통성이 상실된다. 국가의 정통성은 연속성에 있다. 6공화국이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켰듯이 5공화국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국가를 열었는가? 공소시효를 연장한 5.18특별법은 위헌법이다. 특별법은 특정인을 겨냥한 불법적인 위인설법이다. 5.17 전국비상계엄 확대 조치는 고도의 정치적 군사적 성격을 지닌 정치 행위다. 검찰이나 법관들이 나서서 판단할 영역이 아니다. 5.17 이후에 전개된 행정조치들은 국가통치권 차원의 절차이기 때문에 검찰이 용훼할 일이 아니다. 신군부와 5.18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독립적인 존재다. 검찰은 국가 경영이라는 막중한 대사를 한낱 정권장악 수단으로 해석한다. 계엄 자체를 내란이고 폭동으로 여기는 것은 비약을 넘어 비의(非義)다. 전두환에 적용된 법조에는 내란목적 살인죄라는 형법 제88조가 적시돼 있다. 누구에 대한 살인이 내란목적 살인이라는 것인가? 어떤 행위가 살인행위라는 것인가?
검찰은 1980년 5월21일 밤에 계엄사에서 내려진 ‘자위권 발동 지시’를 사실상의 발포 명령이라 하고, 계엄사령관 배후에 전두환이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을 ‘명목상의 발포 명령 책임자’라고 주장한다. 명목상 또는 사실상이라고 한다면 고의도 없고 범죄구성 요건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대통령의 통수 행위까지 내란으로 모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공소장 기재와 같이 제5공화국 헌법은 1980년 9월29일 개정안으로 공고되고, 그해 12월22일에 국민투표로 확정돼서 10월27일 공표되었다. 그런데 검찰은 헌법 개정 자체를 내란의 일환으로 몰고 있다. 헌법 개정 자체를 정권찬탈(국헌문란) 목적의 폭동이라고 몰고 있다. 주권자인 국민이 투표로 결정한 헌법 개정이 내란이라면, 국민 전체가 내란행위자라는 뜻인가? 검찰이 헌법 개정 권력인 국민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것인가?
검찰은 1979년 10월27일 비상계엄 선포행위·1980년 5월17일에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변경하는 안건을 의결한 국무회의, 국무회의장을 경비한 행위, 학생 및 노동자 폭동 진압 행위, 국보위를 통한 비리 공직자 숙청, 불량한 언론인 해직, 교육 정상화 조치 등 모든 개선 조치를 다 내란이고 폭동이라 몰고 있다. 검찰은 통치행위까지 처벌하는 초법적 집단인가?
정승화는 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검찰은 그 판결이 무효라고 주장한다. 기판력(일사부재리)까지 뒤엎는 권능을 가진 존재가 검찰인가! 검찰은 무법적 존재란 말인가? 대통령 명에 따라 노재현 국방장관을 수색하여 그를 대통령에 데리고 간 행위가 어째서 반란행위란 말인가? 12․12 당시 누가 반란군이고 누가 진압군이었는지, 검찰이 재단할 사항인가?
전상석 변호인의 변론이 검찰의 급소를 찔렀지만 김영일 재판부의 귀에는 마이동풍이었다. 1996년 7월8일 제20차 공판에서 피고인 측 변호인단이 변호인 사임계를 재판부에 제출하고 1심 변론을 포기할 것을 선언했다. 증인으로 출석한 윤성민 때문이었다. 변호인들을 12․12사태에 대해 윤성민 참모차장의 지휘가 과연 적법했었는가에 대해 집중 추궁했다.
추궁에 몰린 윤성민이 논리에 어긋나는 대답만 반복하면서 궁지에 몰렸다. 이때 공정해야 할 김영일 재판장이 코너에 몰린 윤성민을 편들면서 피고인들에 불리한 대답을 하도록 노골적으로 유도했다. 이에 이양우·전상석·석진장 등 전두환 측 변호인들과 한영석 등 노태우 측 변호인단이 사임계를 제출했다.
이 사건의 지상 가치는 실체적 진실 규명에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유죄를 단정한 상태에서 형식적으로 재판을 진행하고 있어서 충분한 변론권이 보장되지 않고 있는 만큼 더 이상 들러리식 변론을 할 수 없다.”
제17차 공판에서 변호인은 증인 윤성민에게 물었다.
변호인 : 증인은 12.12 밤, 9시30분경 전두환 피고인으로부터 정승화 당시 총장이 연행된 것은 정승화의 내란방조 혐의에 따른 것이라는 사정을 전화로 통보받은 적이 있지요?
윤성민: 그런 통보 받은 적 없습니다.
이에 변호인단이 그때 통화된 녹음 내용을 틀어주자 비로소 윤성민은 얼굴을 붉히며 통보 받은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이 부분이 판사들의 예단에 방해가 되자 김영일 재판장이 끼어들어 변호인들을 제지시킨 것이다. 이때부터 사건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는 국선 변호인들이 참여하여 형식적인 질문만 조금씩 하고 말았다. 판사들은 예단돼 있는 판결에 딴지를 거는 변호사들을 따돌려서 매우 편했다. 그야말로 재판의 형식만 갖추기로 한 것이다.
변호인들은 검찰에게 내란목적 살인죄의 피해자들이 누구냐 구체적으로 밝혀달라 했다. 이때 김영일 재판장이 매우 부적절한 감정적인 말을 해서 문제가 되자, 재판장이 이 말을 속기록에서 삭제했다. 김영일 재판장의 적절치 못한 표현들 중에는 총질한 사람들이나 알지 피고인들이 어떻게 아느냐? 자위권이 곧 총질하는 것이 아니냐? 재판장의 언사가 거칠고 저질이었다. 이 내용은 속기록(공판조서)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당시 조선일보 기사에는 지적이 돼 있다. 그리고 재판부는 공판을 주 2회씩 강행했다.
변호인들은 주 1회로 열자고, 변론 준비가 어렵다고 연속 요청했지만 재판장은 주 2회로 강행했다. 당시 변호인단이 왜 법관 기피 신청을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변호사 없는 일방적인 1심 재판, 1996년 8월26일의 선고로 마감했다. 전두환에게는 사형을, 노태우에는 징역 22년6개월, 다른 피고인들과 재벌 총수들에게는 몇 년씩의 징역형을 무더기 선고했다.
판결 내용, “12.12는 군사 반란이다.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권력을 잡기 위해, 무력 시위로 대통령을 협박하여 대통령의 기능을 불가능하게 하면서 30경비단에 반란군 지휘부를 설치해놓고, 윤성민·장태완이 이끄는 정식 지휘계통을 와해시키고, 병력을 선제 동원하여 군사 반란(쿠데타)을 일으켰다.”
재판부는 5.18에 대한 죄보다는 12.12에 대한 죄를 더 무겁게 물었다. 12.12는 역사를 바꾼 사건이기 때문이다. 광주 진압은 내란목적 살인행위다. 자위권 지시는 발포 명령이다. 국회 봉쇄·정치인 구속·언론인 강제 해직·국보위 설치 등 전두환 등이 취한 일련의 행위들은 힘 없는 대통령의 이름을 합법적으로 이용한 국헌 문란(내란)행위다.
서울고등법원 재판장 권성 부장판사는 1996년 12월16일 전두환에게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하고, 노태우에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9600만 원을 선고했다.
판결문 “이 판결은 헌법도 아니고 법률도 아닌 자연법을 잣대로 하였다. 자연법이라 함은 ‘사회인식법(여론법)’을 뜻한다. 여느 재판과는 개념을 달리한다. 피고인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여 군의 기강을 파괴했다. 광주시위대는 피고인의 헌법 파괴 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결집된 준헌법기관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전국적으로 속히 확산됐었어야 했는데 이를 무력으로 제압한 행위는 내란이다. 불법 자금을 만들어 돈으로 사람을 움직여 정치를 타락시켰다. 반면 6․29 선언을 수용하여 민주 회복과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행한 것은 국민의 뜻에 순종한 것이다. 권력의 상실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정치문화에서, 권력을 내놓아도 죽는 일을 없다는 원칙을 확립한 일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일이었다. 피고인 노태우는 피고인 전두환을 추수하여 영화를 누리면서 전두환의 업을 이었다.”
여론에 부합하는 인민재판을 한 것이다. 광주시위대를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된 ‘준헌법기관’이라는 사회적 합의도 없는 잣대·증명되지 않은 잣대를 가지고 전두환 등을 내란자로 몰은 것이다. 무기고를 털어 정부군에 총을 쏘고 교도소를 공격한 집단이 헌법기관이다? 전두환이 내란을 해서 정권을 잡았다면 대한민국은 다른 국가로 바뀌어 있어야 한다. 마치 이성계가 쿠데타로 고려를 조선으로 바꾸듯이! 그런데 전두환은 만 7년 동안 헌법을 그대로 유지시켰고 헌법에 따라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가 7년 동안 쌓은 경제적 업적과 국위 선양 업적은 지금까지 이어온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으뜸이며 지금의 먹거리 대부분이 그의 노력과 발상으로 창조됐다. 전두환이 없었으면 경제 대국도 없었다. 이렇게만 해준다면 백 번이고 만 번이고 쿠데타를 하고 내란을 했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의 여론법·국민 인식법에 의하면 쿠데타는 엄청 유익한 것이고, 내란은 엄청 아름다운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아름다웠고 전두환도 그랬다. 이렇게만 봉사해 준다면 쿠데타도 내란도 자주 나는 것이 복 받은 나라가 되는 것이다.
도대체! 전두환은 어떤 인물이고 권성이나 김영일 같은 사람은 어떤 인물인가? 권성이나 김영일은 박정희와 전두환의 업적으로 국민 위에 갑질하며 호강을 하면서도 그 은혜를 알지 못하고 주인을 잡아먹는 맹견 같은 인생이 아니겠는가? 누가 우리 국민에게 필요한 존재였는가? 전두환인가, 권성인가, 김영일인가?
1997.4.17. 대법원 판결은 코미디 백화점
대법원장: 윤관, 주심: 정귀호, 대법관: 박만호·최종병·천경송·박준석·이돈희·김형선·지창권·신성택·이용훈·이임수·송진훈
국민은 대법관들을 굉장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정의를 수호하고 가장 높은 두뇌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아래 대표적인 판결을 보면 잠재했던 온갖 모멸적인 욕들이 대법관을 향해 분출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은 이런 저질들에게 높은 봉급을 주면서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다는 점을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이다.
1. 광주시위대는 전두환의 헌법파괴행위를 저지함으로써 대한민국 헌법을 보호하기 위해 결집한 애국적준헌법기관이다. 헌법기관과 준헌법기관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내란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빠른 속도로 전국에 확산됐어야만 했는데 전두환 등 신군부가 준헌법기관을 무력으로 진압한 것은 내란이다. 광주 재진입 작전은 내란이고, 진입 과정에서 시민을 살해한 것은 내란목적 살인죄에 해당한다.
2.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의 바지였다. 대통령이 서명한 것은 모두 전두환의 책임이다. 계엄령 선포도, 정승화 체포도 대통령이 재가했고, 광주시 재진입 작전인 ‘상무충정작전’도 대통령이 재가했지만, 1979년 12월12일의 재가 시점에서부터 1980년 8월16일 최규하가 대통령을 사임할 때까지의 9개월 동안에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한 모든 사항은 다 전두환이 책임이다. 전두환이 무소불위의 절대권자였다는 것이다. 미치광이 네로 황제도 당시의 대한민국 판사들만큼은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3. 전두환은 대통령과 국방장관이 시키는 일만 해야 했는데 전국의 두뇌들을 동원하여 시국수습 방안을 추진한 것은 국민적 여망을 얻어 대통령을 하려는 음모였다. 전두환에게 집권할 목적과 시나리오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4. 계엄을 선포하느냐 마느냐는 고도의 군사 정치적 판단을 요하는 것이기에 사법부의 판단 대상이 될 수 없지만 전두환의 마음에는 집권 시나리오가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이 바지 대통령을 이용해 계엄령을 선포한 것은 내란이다.
5. 계엄령 발동 그 자체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해악의 고지 행위로 곧 내란이다. 계엄령 발동으로 인해 대통령·총리·장관 등 모든 헌법기관들이 겁을 먹고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계엄 선포는 곧 내란인 것이다.
6.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법률도 아니고 헌법도 아닌 자연법이다. 자연법은 곧 국민 인식법·여론법이다. 인민재판이라는 뜻이다.
7. 5월17일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가결하기 위해 중앙청에 모인 총리와 장관들은 집총한 경비병들에게 주눅 들고 공포에 떨어 의사와 관계없이 무조건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8. 정호용은 광주 진압 작전의 현지 총사령관으로 내란목적살인 행위의 주범이다. 비단 12․12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그 후 전두환을 추수하여 출세했기 때문에 12․12에 부화뇌동한 부화뇌동죄가 인정된다.
9. 2․12에 대해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를 해 준 것은 삼엄한 공관 경비병들로부터 공포감을 느꼈고, 밤 9시30분경에 무단 침입한 6명의 장군들로부터 공포를 느껴 자유의사를 상실한 채 꼭두각시가 되어 전두환이 하라는 대로 결재를 했다.
10. 정승화가 10월 26일 밤 김재규를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 한 것은 김재규가 권총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11. 12․12는 하나회의 쿠데타였다.
12. 이학봉과 전두환은 사전에 쿠데타를 모의했다.
13. 정승화가 전두환을 동해안 경비사령관으로 전보 발령하려 하자 전두환이 선수를 치느라고 12․12를 일으켰다.
14. 정승화가 합수부에서 한 진술은 모두 고문의 결과이기 때문에 무효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의미와 파급 효과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본질은 궁지에 몰린 ‘김영삼 구하기’ 공작이었다. 이 공작에 양심을 상실한 판검사들, 김일성장학금으로 고시에 합격한 판검사들이 대거 몰려들어 초법적 난장판을 벌였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정은 난장판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국가의 정통성(Legitimacy)은 연속성(Continuity)에 있다. 어제의 역적과 충신이 오늘 뒤바뀌는 것은 연속성의 단절이며 정통성의 상실이다. 국가의 체제가 바뀌거나 외국에 점령됐을 경우에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어제의 충신이 오늘 역적이 되고, 어제 받은 훈장을 오늘 박탈당한다면 국가가 위기를 당할 때 누가 목숨 걸고 나서려 하겠는가? 따라서 역적을 충신으로, 충신을 역적으로 뒤바꾸는 행위는 그 자체가 이적이고 여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역적이었던 김대중을 충신으로 바꾸어 놓고, 누가 역적인가는 행적과 작품이 증명한다. 전두환은 하수구에 불과했던 한강을 세계 최고의 아름다운 강으로 바꾸어 놓고, 일본 돈 40억 달러를 가져다 88서울올림픽을 치르기 위한 체육시설과 체육의 마을을 만들었고, 오늘날의 반도체·IT·통신·원자로 산업을 창출·부흥시켜 우리의 먹거리 산업을 마련해주었다. 반면 김대중은 무얼 하였는가? 오로지 북에 충성했다. 전두환이 올려 쌓은 부와 기술을 훔쳐다 북에 주고 연평해전을 통해 국군의 생명을 김정일에 바치고, 북에 해킹 능력을 훈련시켜주고 핵 자금을 대주고, 기아로부터 구출해주기 위해 달러와 쌀과 비료를 주고 의약품을 싹쓸이해 북에 바쳤다. 이런 김대중을 충신으로 만들어준 재판이 바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었고, 대한민국을 경제 세계 10위권으로 등극시키고, 국가 브랜드 가치를 엘리베이터식으로 수직 상승시킨 전두환을 만고의 역적이라고 판결한 재판이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었다. 여기에 동원된 판검사 모두가 반국가 역적들인 것이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반국가·이적·여적 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1989년 부산 동의대 사건에서 경찰관 7명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던져 7명 모두를 불태워 죽인 주범에게 2002년 화폐로 6억 원의 보상금을 주고, 경찰은 많이 죽일수록 민주화 공로가 위대해진다는 명 메시지를 역사에 남긴 것과 조금도 다름없다. 5․18을 북이 주도했느냐 광주가 주도했느냐를 구태여 따지지 않더라도 5․18은 김일성에 최고의 가치이고, 주사파들에게는 최고의 성역이다. 그렇다면 5․18은 주적의 역사가 확실한 것이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이후 대한민국은 껍데기만 자유민주주의 국가일 뿐, 속은 북조선이 요리하는 북조선 분국이고, 광주의 식민지가 돼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는 5․18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공산국가에서와 똑같은 방법으로 철저히 봉쇄돼 있다는 사실이다. 무공훈장은 쓰레기 값이고, 간첩급 민주유공자·살인마 급 민주유공자는 금값이 되어버린 그런 공산국가가 돼 버린 것이다. 이것이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 창조한 국가의 모습인 것이다.
육사가 배출한 사생아 권영해와 권정달, 이 두 인물은 비(非)하나회다. 이들은 하나회에 대한 열등의식과 시기와 분노를 쌓아 왔던 사람들일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죽기 전에 반드시 국가를 위해 군을 위해 양심고백을 해야 할 사람들이다. 하나회 멤버들은 대체로 이 두 사람처럼 야비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두 사람들 하고는 많이 다른 사람들이다. 천하에 야비하고 간교한 이 두 사람으로 인해 대한민국 역사가 뒤집혔고, 군복이 진흙탕에 처박힌 것이다.
서울구치소에서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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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24-05-11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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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 빨갱이들 말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기때문에 신뢰안한다. 5.18폭동은 민주화운동인 적 도 없고 니들 빨갱이들이 일본말가지고 반일선동하는데 그 민주화도 일본말이다. 그렇니까 민주화라는 말 쓰지마라. 입만열면 선동이네 전두환이 초기발포명령자도 아니라는거 이제 알잖아. 뭘 자꾸 개소리하냐 지겹다. 무기고탈취 교도소 폭파테러 공격중 테라한자들 사상자가 많은데 아침에가니 시체가 흔적도 없음 그런데 이걸 멀리까지 비닐에 싸서 학교운동장 1미터 아래 숨기고 그거 평창 동계올림픽때 빼돌린거 아니냐 문재인때 북한 고려항고 왜 내려온거냐? 내려올때 유골 싹 넣어서 보낸거 아니냐 니들 개소리하지마 5.18폭동이 민주화운동 ㅈㄹ하고있네 무기고탈취 교도소 6차공격 폭파테러 그것도 간첩이 전라도에서 가장 많은 교도소를 골라서 공격 간첩만 160명 죄수만 2천명이넘음 그걸 민주화운동 도청에 폭팔물설치 이걸 민주화운동 ㅈㄹ도 풍년이네 누가봐도 이건 아니지 어디서 피해자코스프레 내지르냐 방송으로 불순분자세기들이 저ㅈㄹ하는데 시민들보고 집으로 들어가라고 방송까지 했는데도 기어나오는거는 동조자냐 한심하다. 5.18 이제 아는 사람은 다 알어 속일걸 속여라 국민들이 개 ㅄ인줄아나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