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리크스’ 어산지, 유죄 인정 대가로 자유의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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母國 호주의 외교노력과 美 바이든 대선 전략
폭로행위 ‘공공성과 폐해의 충돌’ 과제로 남겨

임한상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6-26 18:00:08

▲ 미국 정부기밀을 폭로해 스파이방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언 어산지(52)가 체포·수감돼 있던 영국을 24일(현지시간) 떠나 최종 심리가 진행될 북마리아나제도 미국령 사이판으로 출발했다. 이 단계를 거쳐 곧장 고향인 호주로 귀국하며 더 이상의 사법 처리는 없다. 최고 170년형이 선고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극적 반전을 거듭한 결과다. 연합뉴스

▲ 26일(현지시간) 자유의 몸으로 사이판 법정을 나서는 줄리안 어산지. 그의 변호사였다가 옥중결혼한 부인 스텔라에 따르면 마지막 순간까지 석방을 확신하지 못했다고 한다. 연합

미국 정부의 기밀문건 수십만 건을 공개해 ‘세기의 폭로자’로 불린 줄리언 어산지(52) 위키리스크 창립자가 14년간의 망명 내지 수감 생활을 끝내고 자유의 몸이 됐다. 플리바게닝(유죄 인정을 전제로 한 형량 협상제도)을 통해 미 법무부에 스파이방지법 위반 중범죄를 시인하는 조건이었다.

어산지는 마지막 법정 일정을 마친 후 고향 호주로 돌아갈 예정이며 더 이상의 추가 사법처리가 없을 것으로 예고됐다. 어산지 사건은 기밀문건 폭로 행위의 공공성과 폐해 또 양자의 충돌 등 심대한 고민을 남겼다. 언론의 자유를 둘러싼 논란이 앞으로도 인류사회의 화두가 될 전망이다. 일각에선 그의 유죄 인정을 언론자유 침해의 위험한 선례로 보기도 한다.

25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은 어산지의 변호인이었다가 2022년 그와 옥중결혼한 부인 스텔라의 말을 인용해 마지막 순간까지 석방을 확신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AP통신은 14년간 도망자 신세였던 어산지가 석방을 앞두게 된 배경에 그의 모국 호주의 보이지 않는 외교작전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2022년 5월 호주 노동당 정부 출범 이래 앤서니 앨버니지 총리는 어산지 석방을 최우선 외교 과제의 하나로 삼았고 줄곧 미국을 향해 그에 대한 기소 중지를 요구했다. 특히 앨버니지 총리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리시 수낵 영국 총리를 만나 오커스(AUKUS·미국·영국·호주 안보 동맹) 회원국임을 강조하며 어산지의 석방을 설득했다.

그러나 지난해 호주를 찾은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이 어산지 사건에 대해 ‘매우 심각한 범죄 행위’라고 말할 때만 해도 미국 정부는 기소취하 불가 입장을 고수할 태세로 보였다. 하지만 최근 미 법무부가 어산지 사건을 마무리할 계획을 담은 문건을 법원에 제출하면서 상황이 급반전을 맞았다. 결국 26일 그는 미국령 북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 법원에 출석한 후 범죄자 신분을 벗고 법정을 나왔다.

미 법원은 어산지를 기소한 버지니아주 대신 미 영토 내에서 호주와 가까운 사이판을 재판 장소로 결정했다. 미국 형사법상 해당 인물이 기소된 주에서 재판을 진행하는 게 원칙이지만 이번 사건처럼 특정 주에 한정되지 않는 행위거나 피고인의 정당한 요청이 있을 경우 재판 장소를 바꿔줄 수 있다. 어산지가 미국에 송환될 경우 최고 170년형이 예상되기도 했지만 사이판 법원에 출석하는 것으로 모든 과정이 종료됐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던 어산지는 2006년 ‘박해받는 문서들이 모인 거대한 도서관’을 표방한 위키리크스 사이트를 만들어 주목받았다. 공유가 금지된 문서들을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자는 발상이었다. 이후 2010년 위키리크스에 수십만 건의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 관련 미 군사기밀이 공개됐다. 그 자체가 미국 정부에 대한 엄중한 고발일 수밖에 없었다.

미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밀유출을 주도하면서 그는 “지난 6년간의 전쟁이 어땠는지 알 수 있었으며 전쟁 과정이 바뀌어야 한다는 게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이 기밀문서엔 미군 아파치 헬기가 로이터통신 기자 2명을 비롯해 11명을 이라크에서 살해한 사건 등과 관련된 정보가 담겨 있었다. 전직 미 정보분석가 첼시 매닝이 빼돌린 것을 어산지가 세상에 공개한 것이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스파이방지법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으나 앞서 2010년부터 스웨덴에서 성폭행 혐의로 수배돼 도피생활 중이었다. 본인 말로는 “미국 정부의 모함”이다. 이후 에콰도르로 망명했지만 에콰도르 정부가 내부 논란 끝에 망명수락을 철회했고 영국 정부가 어산지의 신병을 확보했게 됐다. 어산지는 영국 런던 벨마시 교도소에서 2019년부터 수감됐으며 미국이 그를 기소하자 범죄인 송환을 두고 법정 공방을 벌여 왔다.

어산지의 변호인 제프리 로버트슨은 호주 ABC 방송과 인터뷰에서 “미 국방부의 어산지 처벌 의지가 강해 협상이 훨씬 더 힘들었다”며 “결국 바이든 대통령이 선거를 앞두고 이 문제를 해결하길 원한 덕분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11월 대선을 앞둔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 전 대통령보다 언론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도덕적 우위를 보여 주기 위해 행한 조처라는 것이다.

위키리크스는 힐러리 클린턴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결한 2016년 대선에서 대량의 민주당 이메일을 공개해 민주당 측을 당혹케 하기도 했다. 당시 트럼프 후보는 “위키리크스를 사랑한다”고 외쳤지만 당선된 뒤 어산지를 기소했다. 정부 기밀문서가 정당의 경우와 같이 취급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산지 석방 당일 위키리크스는 성명을 통해 “그의 자유를 위해 헌신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고 밝혔다.

임한상 기자 hsrim@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