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20] 위로를 건네는 프러시안 블루빛 수레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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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과 범게르만주의 상징이었던 푸른 꽃
수레바퀴처럼 생긴 꽃 모양에서 비롯된 이름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7-15 08:55:51

▲ 들판에 피어있는 수레국화 무리는 멀리서 보면 신비로운 푸른색 융단이 펼쳐진 것처럼 보인다. 윤상구 사진작가

수레국화라는 이름은 톱니 달린 수레바퀴처럼 생긴 꽃 모양에서 비롯되었다. 한해살이 또는 두해살이풀인 수레국화는 한번 심으면 특별한 관리 없이도 잘 자라고 이듬해 수백수천 송이로 퍼져 들판을 푸르게 물들인다.

꽃잎은 주로 파란색이지만 흰색·분홍색·보라색·빨간색·노란색·남보라색·분홍과 흰색이 섞인 색 등 다양한 색으로 피어난다. 수레국화는 유럽에서 건너온 귀화 식물로 프로이센 왕국의 상징이었고 독일에서 ‘황제의 꽃’이라 불리기도 했다.

프로이센과 범게르만주의 상징이었던 꽃

수레국화는 프러시아라고도 불리는 프로이센과 여러 면에서 인연이 깊다. 우선 꽃의 색깔이 ‘프러시안 블루’와 비슷하다. 프러시안 블루는 현대적 합성 안료 기술로 만들어진 최초의 색상이다. 1704년경 프로이센 왕국에서 디스바흐라는 학자가 개발하였는데 당시 왕국의 수도 이름을 따서 ‘베를린 블루’라 부르기도 한다.

프러시안 블루는 만들기 쉽고 가격이 싸며 인체에 해롭지 않은 염료로 물감·잉크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사용된다. 특히 옷감을 물들이는 데 많이 활용되는데 프로이센군의 군복 색깔도 프러시안 블루였다. 복사 기술이 발달하기 전 설계도면 등으로 사용되었던 청사진을 만드는 데도 프러시안 블루가 쓰였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공격했을 때 프로이센의 왕비는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급히 피신하게 되었다. 그때 놀란 자녀들을 달래기 위해 주변에 피어 있던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 꽃이 바로 수레국화였다고 한다. 그렇게 수레국화 꽃으로 위로받은 자녀 중 한 명이 독일 제국 초대 황제가 된 빌헬름 1세였다.

빌헬름 1세는 소설 ‘마지막 수업’의 시대적 배경이 된 프로이센·프랑스전쟁(프·프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다. 프로이센 왕이던 그는 1871년 1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왕국과 공국, 자유 도시들로 나뉘어 있던 독일이 이때 처음 단일 국가로 통일되었다. 빌헬름 1세는 이 무렵 수레국화를 황실 문장으로 정하고 황궁 정원 곳곳에 이 화초를 심었다고 한다.

황제 빌헬름 1세 어린 시절에 위안을 준 꽃

▲ 수레국화라는 이름은 수레바퀴처럼 생긴 꽃 모양에서 비롯되었다. 윤상구 사진작가

이런저런 사연으로 수레국화는 프로이센을 넘어 범게르만주의 운동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1894년 이 운동을 조직한 사람은 라이프치히대학교 교수이며 제국의회 의원인 에른스트 하세였다. 그는 범독일연맹을 창립했는데 이 단체의 목표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모든 지역이 독일이라는 하나의 국가로 뭉쳐 통일되는 것이었다.

범게르만주의는 슬라브 민족·유대인·자본주의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고 독일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도 범게르만주의로 정당화했다. 러시아 제국이 주도한 범슬라브주의도 있었는데 흔히 제1차 세계대전을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충돌’이라고 표현한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지만 범게르만주의는 이후 아돌프 히틀러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치 정권 이전의 바이마르공화국 때도 독일의 팽창을 주장하는 범게르만주의자들의 활동이 계속되었다. 이런 독일 팽창주의에 대한 실천의 일환으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어 사용 지역을 합병했다. 그는 결국 범게르만주의 정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하지만 1945년 독일이 전쟁에 지면서 범게르만주의도 호소력을 잃었다.

앞서 언급한 프·프전쟁으로 유럽에서 프랑스의 체면은 걷잡을 수 없이 손상되었다. 전쟁에 대한 보상으로 알토란 같은 알사스-로렌 지방을 빼앗긴 데다 프랑스 왕실의 안방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황제가 제국을 선포하고 즉위식을 거행하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다. 이 일이 아니더라도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은 오랫동안 앙숙이었다.

유럽 현충일에 프랑스 거리를 메우는 수레국화

그런데 독일의 꽃이나 다름없는 수레국화는 프랑스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영국과 프랑스·벨기에 등 유럽의 국가들과 영연방 국가들은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날짜인 11월11일을 현충일로 기념하고 있다. 해마다 현충일이 되면 유럽 사람들은 붉은 양귀비꽃 모양의 배지를 옷에 달고 다니며 그날을 ‘포피(양귀비)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이하게 프랑스에서는 이날 붉은 양귀비가 아니라 푸른색 수레국화가 거리에 가득 찬다. 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군인들이 파란 군복을 입었던 까닭에 프랑스에서는 참전 군인들을 블루에(Bleuet)라고 부른다. 파란색 군복을 입은 프랑스 군인들이 전장에서 파랗게 핀 수레국화를 보며 위안을 얻었고 이런 연유로 수레국화는 프랑스군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어느 나라든 어느 시대든 어느 연령이든 수레국화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정을 주는 꽃임에 틀림없다. 들판에 가득 피어 있는 수레국화 무리는 멀리서 보면 신비로운 푸른색 융단이 펼쳐진 것처럼 보인다. 프러시안 블루빛 수레국화에 얽힌 사연은 다양하지만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수레국화꽃을 보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를 기원한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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