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칼럼] 부영그룹 이중근 회장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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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9-03 06:31:10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경제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김광규의 시 ‘생각의 사이’ 발췌).

울림이 남다른 작품이다. 김광규는 1980년대 명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쓴 4·19세대다. 한때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답답증을 토로하던 그가 삶을 보는 통찰을 담아낸 시가 바로 ‘생각의 사이’다. 이 멋진 작품은 기업의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 즉 메세나를 말할 때 빠짐없이 인용된다. 요즘 유행어의 하나인 메세나의 사례로 옛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을 말하곤 하지만, 멀리 갈 게 없다.

이 나라가 이만큼이라도 돌아가는 배경엔 크고 작은 기업의 메세나 활동이 있다고 봐야 한다. 리움·호암미술관을 이끄는 삼성문화재단, 공연예술을 지원하는 LG아트센터 그리고 SK그룹의 행복날개 프로젝트 등이 그렇다. 서울 한복판의 교보문고 광화문점도 우리 자부심이자 메세나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이 나라는 반기업 심리로 부글대는 와중에 요즘엔 부영그룹이 각별한 주목의 대상이다.

부영그룹만큼 기업 이미지가 극적으로 좋아진 기업도 드물기 때문이다. 첫 출발은 재계 서열 18위인 이 회사가 올 2월에 내놓았던 출산장려금이었다. 아이를 낳은 직원에게 자녀 1인당 1억 원씩 지급하고, 3자녀 이상 다둥이 직원에겐 영구임대주택까지 제공한다는 파격 구상 말이다. 당장 윤석열정부가 반색했다. 이 장려금만큼은 전액 비과세 처리하겠다고 화답했다.

정부는 7월11일 인구의날에 이중근 회장에게 대통령 표창까지 줬다. 그런 영향 때문일까. 얼마 전 부영그룹 직원 공채 때 20~30대 구직자가 예년보다 5배 이상 몰렸다는 뉴스가 뒤를 이었다. 부영그룹을 둘러싼 기업 이미지 변화는 그만큼 극적이다. 실제로 한국기업평판연구소의 건설사 브랜드 평판 조사에서도 부영그룹은 지난해 16위에서 아홉 단계를 건너 7위로 점프했다.

또 다르게 우리를 즐겁게 한 건 부영그룹이 폐간 위기의 문학잡지 ‘문학사상’을 전격 인수했다는 뉴스다. ‘문학사상’은 1972년 출범한 이후 한때 편집주간으로 문학평론가 이어령이 활약했던 대표적인 잡지다. 부영그룹은 이 회장이 사재를 출자해 설립한 출판사를 통해 ‘문학사상’을 인수하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그런저런 이유로 요즘 호사가들은 10월 선보이는 ‘문학사상’ 제2 창간호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지만, 얘기는 또 있다. 지난달 27일 이 회장이 제19대 대한노인회장에 당선된 것이다. 그것도 총 273표 중 187표를 획득, 그야말로 압도적 지지였다. 이 회장의 광폭 행보가 아닐 수 없고, 요즘 부영그룹을 빼면 볼 만한 뉴스가 드물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어떤 곳인가. 일부 뒷말도 없지 않다. “횡령 배임 건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지난해 8월 특사로 풀려났던 이 회장이 요즘 너무 설쳐대는 건 아니냐?” 과연 진정성이 있느냐는 뜨악한 시선이다. 부영그룹의 움직임이 일시적 기여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부영그룹의 요즘 사회적 기여가 넓은 의미의 메세나에 속한다는 점이다.

메세나는 문화예술만이 아니라 사회·인도적 차원의 공익사업도 포함한다는 게 요즘의 추세다. 실제로 노인회장 당선과 별도로 이 회장은 2년 전 고향(전남 순천) 사람과 초·중·고 동창에게 1인당 최대 1억 원씩을 무상 지급한 걸로도 유명하다. 전에 없던 사회적 기여 방식이다. 그렇게 쓴 현금만 1400억 원인데, 그걸 남몰래 진행하는 바람에 세상에 알려진 건 정작 1년 뒤였다.

그런 게 모두 고향을 지켜 준 분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는데, 물어보자. 어느 대기업 총수가 그렇게 했던 적이 있던가. 실은 젊은 시절 공군에서 복무했던 이 회장의 군에 대한 애착도 상당하다. 격오지 공군부대의 체력단련실 개선비로 별도의 거액의 돈도 기부했기 때문이다.

사실 국내 대기업의 메세나 활동을 상징하는 분은 19년 전 타계한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2대 회장이다. 대중적 인기가 덜한 실내악단인 금호현악사중주단을 키우기 위해 그가 해 온 섬세하고도 지속적인 공헌은 훌륭한 메세나의 사례로 남아 있다. 필자가 아는 그는 대학교수 출신이라서 그런지 유독 댄디하면서도 정중한 스타일이었다.

반면 키 186cm의 거인 이 회장은 그런 스타일과 또 다르다. 장학재단을 만들고 박물관·미술관 세우는 것과 달리 보다 창의적이고, 대중적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구수한 메세나 활동의 새 문법을 제시 중이다. 김광규의 시 ‘생각 사이’ 식으로 말해 시와 세상 사이의 새 모델일까. 휴지와 권력과 돈과 통계만 남을 뻔했던 세상을 그가 움직여서 좀 더 살맛이 나게 만드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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