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3] 1986, 그 지긋지긋한 악몽 속으로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연재소설

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2-10 06:20:33

와인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다. 두 잔 넘게 들어간 와인은 승연의 자제심을 흔들었다. 고기는 고기 본연의 맛을 즐겨야 제대로 고기 맛을 아는 사람이라며 뻘건 핏물이 질펀한 채로 고기를 먹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게다가 덜 익혀 물컹한 고기를 잘게 썰어 입안에 얌체처럼 집어넣는 모습도 보기 싫었다. 그보다 더 보기 싫었던 건, 잘게 썬 고기를 입에 넣고 껌처럼 짝짝 소리 내며 씹어 먹는 모습이었다. 교양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천박함 그 자체였다. 승준 엄마가 ‘그’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가 가난한 사람이어서 좋다고 했다. 그녀는 ‘그’가 솔직하고 인간미 넘쳐서 좋다고 했다. 인간 냄새가 나는 것이 전임 대통령을 닮았다고도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는 걸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그’에 대한 찬사를 멈추지 않았다. 짜증 났다. 그런 얘기는 함부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정치 이야기는 이제 신념과 세계관의 연장이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가장 나빠질 수 있는 얘기가 정치와 종교 이야기였다. 진영논리로 갈라진 정치는 종교나 마찬가지로 맹목적이다. 속에서 뭔가 치올랐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 않은 말이 승연 입에서 나왔다. 그것은 준비되지 않은 말이었기에 하나도 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형수 보지를 찢겠다는 사람이 정상이에요? 물리적으로 타인의 성기를 확장하겠다는 게 솔직하고 인간적이에요?”

보지. 그 단어는 자리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것은 없는 사람에게는 충격을, 있는 사람에게는 당혹함과 불쾌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수습할 수 있는 사람도, 수습 가능한 방법도 없었다. 게다 그 자리에 미성년자가 둘이나 있다는 것도 잊었다. 식사는 채 마치지 않은 상태였고 디저트가 남았지만, 누구 하나 음식을 마저 끝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리는 파국으로 끝났고 그날 승준 엄마는 그 일을 모욕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모욕은 갚지 않으면 잊지 못한다. 그걸 갚겠다고 이런 유치한 짓을 하다니.

수정은 화가 났고 남편은 우울한 표정이었다. 누가 먼저라도 굳이 거기서 꼭 그랬어야 했냐고, 왜 못 참았냐고 다그쳤으면 좋으련만 둘은 성난 얼굴을 하면서도 입은 굳게 닫았다. 심정은 이해하는데, 행동은 옳지 못했다는 신호였다. 마치 상견례를 망친 예비 혼주가 된 기분이었다. 결혼이었으면 갈라서고 말았어야 할 집안임을 확인한 사건이었는데도 왠지 파국이 된 결과가 승연 때문인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냥 밥이나 먹지 왜 대선 주자 얘기는 꺼내 가지고…. 손님을 초대한 식탁에서 정치 얘기를 꺼낸 잘못은 승준 엄마한테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로 자존심이 상한 승준 엄마의 소심한 보복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승연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금이 가고 있었다. 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의식은 저항했지만 기억은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어느 봄날로, 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 속으로 승연을 빨아 당기고 있었다. 1986년이라는 지긋지긋한 악몽 속으로.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박선경 필진페이지 +

후원하기

정기 후원
일반 후원
무통장입금: 하나은행 158-910019-39504 스카이데일리
시대의 금기를 깨는 정론지 스카이데일리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만들어집니다.

정기 후원 독자께는
스카이데일리가 주최하는 각종 행사에
초대, 할인 혜택 등을 드립니다.

매월 5만 원 이상 정기 후원 독자께는
스카이데일리 신문과
스카이데일리가 발행하는 최신 단행본을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