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6º
습도 70%
대전 0º
습도 60%
제주 2º
습도 60%
)
14일 제61차 뮌헨안보회의(MSC) 석상에서 J.D. 밴스 미국 부통령이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발발 3주년을 앞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수습하는 게 최대 화두인 이 자리를 빌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대신한 ‘마흔 살짜리 트럼프’가 트럼프보다 정중하고 지적인 달변으로, 사실상 전체주의화한 피씨즘(정치적올바름주의)·워키즘(깨시민주의)의 유럽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한 것이다. 심오한 내용이었으며 러·우 전쟁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극좌 내지 좌편향된 국내외 주류 언론에게 즉각 이것을 곱씹어 소개할 역량이 있을 리 없다. ‘트럼프 하수인 밴스가 유럽을 벌컥 뒤집어 놓고 갔다’ 쯤으로 여겨지던 가운데 “밴스의 포효” “인류사적 정치 혁명”을 읽어 낸 유튜브 ‘세뇌탈출’(뱅모 박성현) 3507편이 단연 빛났다. 주사파 아닌 ‘찐 좌파’에서 오래전 전향한 박성현은 인문학적 소양과 한국 지식인 특유의 지정학과 문명사의 연관성을 꿰뚫는 시각을 장착한 인물이다. 트럼프 2기의 등장이 단순히 미국 국내 정치 격변 정도가 아니라 ‘혁명’이며 우리나라의 운명과도 맞물려 있다는 관점에 깊이 공감한다.
냉전의 한복판이던 1963년부터 유럽 안보를 논해 온 MSC, 우크라이나를 앞세워 러시아를 성토하는 그 자리에서 밴스가 ‘무엇으로부터의 안전’보다 ‘무엇을 위한 안전’인지 성찰할 것을 촉구하며 유럽이 러시아의 위협 등 외부 요소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중임을 날카롭고도 묵직하게 지적했다. 지켜야 할 가치를 저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어 대량 난민 수용이 ‘인권’ ‘약자·소수자 보호’ 등 아름다운 명분 아래 강행될 때 유권자들에게 물어보지 않았다며 그게 왜 민주 질서 파괴인지 밴스는 설명했다.
이민 물결 속에 가족의 안전과 직장을 지킬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저항을 ‘극우’로 낙인찍어 심지어 형사 처벌까지 한 여러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영국의 임신중절 전문병원 근처에서 한 50대 남성이 과거 연인과의 사이에서 잉태됐다 중절된 아이를 위해 3분 정도 묵념하다 ‘낙태권에 영향을 준 혐의’로 기소돼 거액의 벌금을 물었다는 이야기도 놀랍다. 밴스는 미국·유럽이 ‘우리’라 칭할 만한 관계로 이어질 것을 고대하면서도, 현재의 유럽은 트럼프에게 압승을 안긴 미국과 협력할 길이 없음을 짚었다. 이대로는 더 이상 가치공동체이기 어렵다는 뜻이다.
우크라이나 문제 해결을 위해 미· 러가 직통 대화를 개시하자 유럽 주요국들이 바짝 긴장한 채 투덜대지만 속수무책이다. ‘우크라이나 지원 지속’을 외치는 서유럽 정상들은 하나같이 정치적 미래가 불안한 상태다. 프랑스·독일 정상은 자국중심주의 정당의 약진 앞에 언제 무너질지 모를 상황이며, 영국의 경우 보수당 실패의 반사이익으로 작년 7월 크게 이겨 집권했을 뿐 앞날이 암울하긴 마찬가지다. 취임 9년 만에 불명예 사임한 채 후임자가 나올 때까지 직을 수행 중인 캐나다 총리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를 내세운 좌파 해체주의를 신봉하며 트럼프의 귀환으로 본격적으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정상들이라는 사실이다.
최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외무장관의 망연자실 낙담한 기색이 보기에 딱할 지경이었다. “푸틴을 믿지 말라, 동맹 가치를 가진 우크라이나를 더 중요시해 달라”는 호소도 무색하게 트럼프에게선 매정한 답이 돌아왔다. 미·러 외교 수장이 첫 만남을 가진 직후 트럼프는 협상 배제에 불만을 표출한 우크라이나를 향해 “선거가 오래동안 없지 않았나”고 꼬집었다. 러·우 전쟁은 미국의 일이 아니며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고 역설해 온 트럼프가 ‘젤렌스키 평가’도 끝낸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대선이 작년 3월 전시 계엄 중임을 명분으로 미뤄지면서 대통령 임기가 자동 연장된 상태다. 젤렌스키정부는 헌법적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러시아 측에선 정통성을 문제시하며 평화협상 시 상대할 수 없다고 말해 왔다. 젤렌스키에게 “국가권력 찬탈”이라는 독설도 날렸다. 트럼프 역시 ‘협상 테이블에 앉으려면 선거를 거쳐 정통성을 증명하라’는 입장이다. 심지어 “대통령 지지율 4%” “나라는 산산조각 났다”는 말로 젤렌스키를 총평했다. 우크라이나 매체가 자국 내 한 싱크탱크의 여론조사 결과 ‘지지도 51%’를 인용해 반박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20세기 한반도와 21세기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위상을 등치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미 조야에 좌파가 바글바글하던 시절, 이승만은 한반도의 세계사적 의미와 냉전의 도래를 파악하며 6·25전쟁을 미국의 이슈로 만들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한반도에 묶인 미국은 그러나 향후 시대적 과제인 ‘중국 제어’에서 효과를 누리게 될 것이다. ‘트럼프의 미국’에게 친미 자유공화 시민들이 사는 대한민국이야말로 미래를 함께할 존재다. 젤렌스키는 쥐스탱 트뤼도처럼, 조만간 올라프 숄츠·키어 스타머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처럼 밀려날 가능성이 높다. 지구촌에 확산 중인 트럼피즘의 힘이다.
2022년 7월 말께 온라인에 ‘러시아로 이사할 시간’이라는 제목의 약 60초짜리 작자 미상 영어 동영상이 유포됐다. “이것이 러시아”라는 말로 시작해 러시아의 문화·역사 자산들이 열거된 끝에 ‘전통 가치’ ‘기독교’ ‘캔슬문화 부재’ 등이 언급된다. 유럽을 향해 누가 진정한 서방 가치의 수호자인가를 묻는 듯했다. 마무리 멘트인 “지체하지 마세요… 겨울이 옵니다”는 대러 제재로 고전 중인 유럽을 놀린 셈이다. 값싼 러시아 에너지가 유럽의 번영을 지탱해 왔다는 점, 19세기 나폴레옹과 20세기 나치 침공을 받았을 때 러시아를 구한 게 ‘동장군’이었음을 일깨우기도 한다.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12
좋아요3
감동이에요1
화나요0
슬퍼요0
연재기획 ‘반대세의 비밀’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