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51] ‘나를 잊지 마세요’ 호소하는 물망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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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 헨리 4세의 문장으로 유명해진 꽃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5-03-10 09:47:36

▲ 유럽이 원산지이며 여러해살이풀인 물망초(勿忘草)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다. 윤상구 사진작가

유럽이 원산지이며 여러해살이풀인 물망초(勿忘草)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다. 이름 그대로가 꽃말이다. 이름에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있어서인지 그에 관련된 전설도 여러 가지인데 그중에는 조물주가 등장하는 거창한 전설도 있다.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할 때 꽃들을 만든 후 각기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물망초는 이름을 받지 못했다. 크기가 작은 물망초는 다른 꽃들에 가려 조물주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물주가 꽃 이름 붙이는 일을 마무리하려 할 때 물망초가 “나를 잊지 마세요”라고 외쳤다. 조물주는 그제야 물망초를 발견하고 말했다. “네 이름은 ‘나를 잊지 마세요’로 해야겠구나.”

슬픔과 안타까운 사연 품은 애처로운 운명

물망초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영국 왕 헨리 4세가 문장으로 사용한 이후부터라고 한다. 잉글랜드 랭커스터왕가의 시조인 헨리 4세는 1398년 반역 혐의로 추방되었다.

추방지 프랑스에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이 잊히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 물망초를 상징으로 삼았는데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에도 그대로 문장으로 사용한 것이다.

물망초만큼 그 꽃말이 널리 쓰이는 경우도 흔치 않다. 이 꽃은 기억해야 할 사람,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을 알리는 캠페인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캐나다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을 기억하는 상징으로 쓰인다.

물망초는, 치매로 가족의 기억마저 놓치는 환자와 가족, 의료진의 노고를 위로하는 꽃이기도 하다. 여러 의미에서 물망초는 가련한 작은 몸 안에 슬픔과 안타까운 사연을 품고 있는 애처로운 운명의 꽃인 듯하다.

캅카스 3국 중 하나인 아르메니아 곳곳에는 물망초 꽃 모양의 보라색 스티커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1915~1918년에 일어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잊지 말자는 뜻이라 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아르메니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제국은 전쟁 치르는 데 몰두하였고 기회를 얻은 아르메니아인들은 독립을 주장하며 봉기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4월 24일 이스탄불에서 본격적으로 학살이 시작되었다.

오스만제국은 아르메니아 지식인들을 처형하고 18~50세 남성들을 강제로 징집했다. 이들 대부분은 혹독한 군사 훈련과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가 사살되거나 굶고 병들어 죽었다. 여성과 어린이들은 시리아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다.

아르메니아 곳곳을 장식한 보라색 물망초

▲ 물망초는 기억해야 할 사람,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을 알리는 캠페인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윤상구 사진작가

1894〜1896년에도 이스탄불 등 서쪽 대도시를 중심으로 학살이 자행되었다. 러시아-투르크 전쟁을 치를 때는 기독교도인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러시아 군대와 힘을 합해 무슬림을 몰아낸다는 소문이 무슬림 난민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이 소문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튀르키예인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오스만제국 무슬림들은 아르메니아인을, 적군과 한패가 되어 언젠가는 자신들을 공격할 위험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1894년,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의 충돌을 오스만제국 군대가 진압하는 과정에 2만여 명이 희생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의 피해를 국제 사회에 호소했고 유럽 여러 나라는 오스만제국을 비판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이뤄지지 않은 채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20세기 초에 이뤄진 두 번째 학살로 사망한 아르메니아인 수는 20만 명(튀르키예 측 집계)에서 200만 명(아르메니아 측 집계)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미네소타 대학 ‘홀로코스트 및 제노사이드 연구센터’에 따르면 학살 이전 오스만제국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은 213만 명이었는데, 이후인 1922년에는 48만여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 수치 변화는 ‘인종 청소’라는 비인도적 사건이 있었다는 근거로 제시되곤 한다.

“비극 겪은 아르메니아인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유럽 20여 개국은 당시 사건을 ‘제노사이드(인종 학살)’로 규정하고 있다. 2012년 1월 프랑스 의회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부인 금지법’을 통과시켰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아르메니아 대학살 100주년 추모 미사’에서 “20세기 최초의 인종 학살로 여겨지는 비극을 아르메니아인들이 겪었다.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라고 밝혔다.

유럽 의회는 튀르키예 정부를 상대로 ‘제노사이드를 인정하라’라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독일 연방 의회는 대학살 100주년 관련 결의안 문구에 ‘집단 학살’이라는 표현 사용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4월 24일은 1915년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이 일어난 날로, 매년 이날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며 튀르키예를 비판하는 국제적 캠페인이 개최된다.

인간은 무엇이든 기억하고 잊지 않기를 원하지만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커다란 선물이라는 말도 있다. 기억을 뇌리에서 지울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은 지속되고 그 기억은 새로운 비극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때로는 상처 치유를 위해 기억을 지워버릴 필요도 있다고 하면 너무 비정한 얘기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말자는 물망초가 원한을 되새기는 존재가 될까 두렵기도 하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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