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역병의 사신(邪神)이 도래한 것일까. 죽음의 밤도 시대처럼 오는 것인가. 숨쉬기조차 무섭게 만들었던 전염병이 온 지구를 꽤 오래 어둠에 가뒀던 악몽은 두 공포를 현대인에게 계시했다. 하나는 일상이 우연한 계기로 비틀리면 살인귀로 돌변할 수 있다는 공포요, 다른 하나는 인류 역사가 질병의 역사라는 공포다. 죽음의 검은 밤이 계절처럼 반복되는 굴레에 묶인 수많은 이들이 악몽의 잔상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할 현시(現時)에 비보와 희보가 함께 왔다. 악마 같은 괴질의 변종 바이러스가 다시 꽃피기 시작하고 있다는 불길한 징조가 검출되는 상황에서 최초의 뱀파이어 영화이자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걸작 ‘노스페라투’가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리메이크를 통해 스크린에 재림했다.

 

무르나우 감독이 브램 스토커의 원작 소설 ‘드라큘라(1897)’를 각색해 연출한 ‘노스페라투(1922)’가 세계영화사에 지우지 못할 핏자국을 새긴 후, 그 혈흔이 숱한 흡혈귀 영화들을 낳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영화사적 계보에서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노스페라투(1979)’가 노스페라투(1922)의 가장 충실한 리메이크작으로 지목될 수 있겠다. 로버트 에거스의 ‘노스페라투(2024)’는 그 계보를 이었다는 의의에만 속박되지 않는다. ‘노스페라투(2024)’는 팬데믹 시기에 예민하게 감응하는 에거스의 재해석을 통해 무르나우 버전의 표현주의적 음기를 더욱 생동감 넘치도록 풍부하게 사실화하면서도 헤어초크 버전의 상징성을 응용하는 데에 일정 성취를 얻었다고 사료된다.

 

‘노스페라투(2024)’의 사실적 공포감은 ‘전율’로부터 격렬히 비롯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전신을 강력히 떠는 릴리 로즈 뎁의 연기가 대변하듯, 수차례 경련파를 발산하는 엘렌의 광기는 무르나우판이 무성영화로서 지닐 수밖에 없는 표현의 한계를 잘 극복한다. 그녀의 광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한밤중에 눈물을 흘리면서 어떤 존재든 좋으니 자신에게 와 달라고 말하는 엘렌의 기도를 들어보면 어떨까? 이 절실한 기원은 그녀의 내면에 잠재하는 깊은 불안과 고독 같은 정신병리 요소가 올록 백작의 한 성분임을 은밀히 현시(現示)한다. 왜곡된 인간 심성으로부터 튀어나온 어두운 욕망이 사회에 전율적 치명타를 가하는 실례들이 그 얼마나 창궐했었는가.

 

올록은 전율의 원흉이 육화된 캐릭터다. 쥐벼룩을 매개해 전 유럽을 장악했던 페스트는 적절한 치료제 없이는 몰아내기 힘든 병이었다. 그런 점에서 올록은 경외에 가까운 충격과 공포를 초래했던 페스트의 악마화로 해석될 만하다. 이 악마성이 세 편에서 각각 다르게 상징화되는 연출 방식을 살펴보는 일도 유익할 것이다. 무르나우의 것은 벽에 비친 뱀파이어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표현주의적 기교의 원조를 제시한다. 헤어초크와 에거스도 이 표현주의적 연출을 구사한다. 그러나 전자가 비행하는 박쥐를 여러 번 보여줌으로써 그 박쥐 이미지를 흡혈귀의 상징으로 암시하는 방법도 썼다면, 후자는 올록의 거대해진 손 그림자가 마을 전체를 뒤덮어 가는 쇼트를 삽입해 페스트의 위력적 확산을 상징화했다.

 

엘렌은 그 불순한 마귀가 승리하는 참극을 끝맺기 위해 청순한 여인으로서의 비극을 스스로 끌어안는다. 그 비극은 첫닭이 우는 선라이즈의 때까지 올록을 자신의 품에 안는 엘렌의 자기희생으로 완성되는데, 전체적인 명도와 색조가 음침하고 서늘한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화사하고 따스히 느껴지는 장면이 바로 이 엔딩씬이다. 침대 위에서 청명한 햇빛에 피를 뿜으면서 죽은 올록의 시체와 엘렌의 알몸이 포개진 모습을 직부감 쇼트로 보여주는 이 결말은 사실적 강렬함과 안온한 희망을 모두 품고 있다. 아마도 이 희망은 한 역병의 습래가 필연적이듯 그 역병의 궤멸도 꼭 온다는 계시로부터 빛나는 것이리라. 자신을 역귀에게 제물로 바쳐 대재앙을 종식한 성녀(性女/聖女)의 순수한 용기가 담긴 이 엔딩은 그래서 빛나는 것 같다. 유행병이 음험하게 부활하고 있는 작금에 영화사의 고전을 변이시켜 그 재각색에 따를 영욕을 기꺼이 무릅쓴 에거스의 괴기가 진실한 영화 사랑으로 다가오는 감동도 이 엔딩과 포개지는 듯하다. 전작들에서 난해한 괴기를 자아내는 데에 능했던 그의 역량이 ‘노스페라투(2024)’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 바, 그 괴기에 감염될 수 있는 자는 복(福)되리로다.

 

 

1938년 독일의 한 도시, 토마스 후터는 부동산 법률 중개소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직원으로, 유년기부터 깊은 병적 불안에 시달리는 엘렌과 함께 행복한 신혼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 토마스에게 중개소 사장은 기쁘면서도 부담스러운 업무를 제안한다. 그 업무는 부동산 계약을 원하는 고객이 있으나 그 고객이 병약한 관계로 고객이 사는 곳으로 토마스가 직접 가서 계약 체결을 도와달라는 것. 토마스는 해당 계약이 성사되면 자신을 정직원으로 전환해주겠다는 중개소 사장의 약속 때문에 그 업무를 수락한다. 한동안 혼자 지내게 돼서 심한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는 엘렌을 뒤로하고 토마스는 먼 이국으로 떠난다. 그 고객의 이름은 올록 백작으로, 그는 사실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뱀파이어. 올록이 배를 타고 엘렌이 있는 도시로 옴과 동시에 그 도시는 쥐들이 옮긴 페스트로 인한 대혼돈에 휩싸이고, 엘렌은 자기희생으로 올록을 없앨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올록의 성을 탈출한 토마스는 엘렌을 구하기 위해 고투하지만, 엘렌은 이미 각오를 굳힌 상태. 엘렌이 해돋이와 함께 첫닭이 우는 아침까지 올록을 자신의 품에 안은 덕분에 올록은 죽음에 이른다. 엘렌의 희생이 흡혈귀와 역병의 공포를 몰아내고 인류를 구원한다.

 

 

로버트 에거스는 암울하고 난해한 성향의 영화들을 잇달아 연출해 주목을 받는 감독이다. 이러한 성향은 그의 단편 영화 데뷔작 ‘헨젤과 그레텔’에서부터 나타나는데, 흑백 무성영화 형식의 이 영화는 독일 표현주의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잔혹한 동화다. 인간의 뒤틀린 내면을 무섭게 조명하는 이런 고전적 성향은 그의 장편 영화 데뷔작 ‘더 위치’, 두 등대지기 사내가 미쳐 가는 과정을 흑백 화면에 담은 ‘라이트하우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면서 울부짖는 짐승으로서의 영화적 ‘햄릿’인 ‘노스맨’, 최신작 ‘노스페라투’에 꾸준히 투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