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의 만사만감(萬事萬感)] 삶을 공공재로 살아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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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2-13 00:02:55

12월 초에 습기를 잔뜩 먹은 눈이 많이 내려 풍성한 겨울 경치를 연출했다. 하지만 나무들은 피해가 심했다. 눈의 무게 때문에 가지가 꺾이거나 몸통이 반으로 갈라지거나 심지어는 70~80년을 지탱한 큰 나무들이 그대로 부러져 주저앉기도 했다. 둥치가 꺾이면서 그 여파로 뿌리까지 뽑힌 나무도 있었다.

낙엽송보다는 상록수가 피해가 심했는데 그건 소나무 같은 상록수는 잎을 단 채로 겨울을 나기 때문이리라. 겨울에도 창연하게 서 있는 소나무는 우리에게 활력과 용기를 주지만 나무 입장에서는 지독히도 힘든 시기를 버티고 있는 셈이다. 나무들은 죽어서도 다른 생명을 살리는 재주가 있다. 죽은 나무에 기대어 사는 생물종이 수천 개가 넘는다.

나무는 가을에도 아주 바쁘다. 겨울이 되기 전에 잎을 빨리 떨궈야 하기 때문이다. 씨앗을 먼 곳으로 독립시키는 것은 기본이고 봄부터 열심히 일해 준 잎도 서둘러 떠나보내야 한다. 낙엽송이 잎을 떨어뜨리지 않으면 이번 폭설 때처럼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나무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

가을에 나무는 수분을 어떻게든 내보내서 월동준비를 한다. 물기가 있으면 겨울에 얼어 죽기 때문이다. 낮밤의 기온 차이와 강한 바람이 잎과의 이별을 돕는다. 떨어져 나간 잎들은 새로운 삶의 장에 선다.

가지에 붙어 평생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그들이 이제 나무와 작별하고 대지의 품에 안길 차례이다. 어떻게 열매와 씨앗을 길러 냈는지, 자신을 갉아대는 적을 어떻게 현명하게 물리쳤는지, 뜨거운 태양과 무서운 빗줄기 속에서 어찌 견뎠는지 모두 다 잊는다. 공치사 따윈 없다. 잎들은 다이빙 선수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호흡을 가다듬고 땅으로 땅으로 내리꽂힌다. 마침 살포시 내려앉는 잎에게 말을 건 적이 있다.

“이제 너의 생이 끝났어. 슬프지 않아?”

잎이 대답했다.

“나의 생이 끝났다고?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나는 처음에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 길에는 또 다른 짜릿함이 있어.”

“멋져 보이고 싶은 네 심정은 이해해. 하지만 사람들은 낙엽이 된 너를 보며 아주 슬퍼한단다.”

“그렇지 않아. 이제부터 진짜 내 삶을 사는 거야. 나는 자유롭거든. 내가 어딜 가든 내가 종일 춤을 추든 잠을 자든 아무도 나를 속박할 수 없어.”

잎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머리를 갸우뚱하고 있는 내 앞에서 쏜살같이 내달려 사라졌다. 회오리바람에 빙글빙글 돌면서.

잎은 어디로 갔을까. 어쨌든 잎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꽃과의 이별·열매와의 이별·다른 잎들과의 헤어짐·곤충과 새들과의 이별…. 마지막으론 엄마나무와의 별리를 겪은 잎은 아무 여한이 없어 보였다. 푸르름을 뽐내던 청춘의 시절과 알록달록 물들던 중년의 시절을 지낸 그들은 영광과 칭송과 찬사를 뒤로 하고 본래 그들이 왔던 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마주 보고 있던 이웃 나무의 잎들과 하나가 되어 그간 궁금했던 일들을 묻고 대화를 나눈다. 땅의 감촉을 느끼고 사람들의 발에 밟혀도 본다. 자신을 쓸어내리는 빗자루도 만나고 커다란 포대에 담겨 무수한 새 친구들과 만난다. 그들은 어디로 갈까.

도시의 낙엽은 파쇄·압축·고형화·여과·중화·소각·흡착·소화 등의 물리·화학·생물학적 공정 과정을 거쳐 땅에 묻히거나 바다로 배출된다. 인간 문명의 손을 복잡하게 거치지만 결국 그들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자연의 공공재가 되어 다시금 생명을 키우고 살리는 일을 한다. 나뭇잎 시절에는 나무를 위해 살았지만 낙엽이 되면 생명을 위해 산다. 그들은 죽지 않는다. 생명의 수레바퀴 속에 있을 뿐이다. 그들의 행보에 인생의 답이 있다.

중년 이후 삶은 공공재이다. 자립을 시작한 청년기부터 중년까지가 가족을 거두고 자식을 양육하는 사적인 시기였다면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이후의 삶은 공공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내 삶을 꾸리는 데 썼던 나의 에너지와 자산은 공공을 위해 사용된다. 시야를 넓혀 지역사회를 보고 국가를 생각하고 지구를 걱정한다. 인간에만 잔뜩 집중했던 관점을 바꾸어 다른 생명체인 동물을 염려하고 식물을 배려한다.

그렇게 살아 보면 홀가분하고 멋지지 않겠는가. 물론 젊은 시절부터 이미 충분히 그렇게 살아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분들에게는 작은 일탈을 권해 본다. 나뭇가지에 달린 찬연한 잎을 몇 개 따서 책갈피에 보관하는 것이다. 어떻게 소중한 단풍잎을 딸 수 있냐고? 여름 잎은 안 되지만 가을 잎은 괜찮다. 가을 단풍은 땅 위에 있든 나뭇가지에 달려 있든 모두를 위한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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