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공공의료 ‘국민보건서비스’(NHS)에 대한 만족도가 또 사상 최저를 기록했다. 2일(현지시간) 현지 싱크탱크 넛필드 트러스트·킹스펀드가 작년 9∼10월 약 3000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NHS 만족도는 21%로 전년보다 3%p 떨어졌다. 이 연례 조사가 시작된 1983년 이래 가장 낮은 수치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NHS 만족도가 60%였으며 이후 매년 하락해 왔다.
지난 70년간 영국의 자랑 NHS였으나 파탄에 이른 모양새다. 의료의 복지 측면만 강조한 채 의사에게 불리한 과세 체계 아래 병원 폐업이 속출한 끝에 이런 상황을 맞이했다. 응급실(A&E)에 대한 만족도가 19%로 5년 전(54%)보다 크게 떨어졌고, 치과에 만족한다는 응답의 경우 60%에서 20%로 급락했다. 영국 의료체계에서 일차적으로 접하게 돼 있는 일반의(GP) 만족도도 68%에서 31%로 반토막 이상 내려갔다.
응급실 대기 시간 불만이 69%로 가장 높았고, 상급 병원 진료 예약에 걸리는 시간(65%), GP진료 예약에 걸리는 시간(62%)에 대한 불만이 치료 범위(27%)와 서비스의 질(24%)보다 훨씬 컸다. ‘NHS 직원이 너무 적다’는 응답자가 72%에 달했다. 댄 웰링스 킹스펀드 선임 연구원이 언론에 “NHS 이용 자체가 너무나 어려워졌다. 접근하지도 못하는 서비스에 어떻게 만족하겠느냐” 반문했다.
이번 조사는 노동당이 정권 교체에 성공한 지 2∼3개월 만에 이뤄졌다. 키어 스타머 정부가 공공 재정 강화를 위해 지출 절감을 선언했으며 NHS 운영 효율화를 내세워 운영조직인 NHS잉글랜드를 폐지해 그 기능을 중앙 부처로 회수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그러나 NHS에 정부 예산을 ‘늘려야 한다’ 응답 46%, ‘유지해야 한다’ 41%에 비해 감축하길 바란 응답자는 8%에 그쳤다.
NHS 지출의 효율성 문항엔 32%가 ‘모르겠다’, 28%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NHS 지출 관련 항목에서 응답자의 지지 정당별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의료계 상황이 열악해진 점에 정치적 성향을 초월해 대부분 공감하고 있다는 뜻이다. ‘부자들의 돈을 뽑아낼 의도’였던 영국의 조세 정책이 고도로 전문화된 의사들과 수술 전문 외과 의사들의 대거 은퇴를 초래했고 그로 인한 피해가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갔다.
이른바 ‘진보적’ ‘정의로운’ 과세제도 때문에 영국의 환자들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고 있는지 상세히 밝힌 보고서가 2019년 나왔다. 이에 따르면 이미 NHS는 의사 부족, 긴 대기 시간, 의료 배급제로 인한 만성 위기 상태임을 보여준다. 2018년 공공 의료시설에선 441명의 일반의들이 일을 그만뒀고 6월 기준 공공 의료진 1만1576석이 비었다. 그때까지 6년간 외과 병원 585곳이 문을 닫았다.
2013년 18개 외과 병원이 폐업했는데 2018년 한 해 138개 외과 병원이 사라졌다. 보수당 정권 아래 일어난 일이며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몇 년 전 현지 매체 데일리 메일 분석에서 “영국의료협회(BMA)에 따르면 과중한 국민연금 세율로 인해 진료를 할수록 오히려 손해를 보기 때문에 조기 은퇴를 하거나 진료 시간을 줄이는 의사들이 늘고 있다. 이게 나머지 동료 의사들 진료 부담을 늘려 도미노 효과를 가져오자 그들마저 사기가 저하돼 일을 그만둔다”고 설명됐다.
더구나 “점점 더 많은 의사들이 ‘시간제 진료’를 하게 돼 사태를 악화시켰다.” 환자들을 제때 돌보기 위해 시간 외 근무를 하면 초과 근무수당 때문에 연금 세금공제 혜택을 못 받는다. 수천만 원의 추가 세금 부담이 두려워진 의사들이 시간 외 근무를 기피하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영국 보건부는 3년간 의사 약 3500명이 국민연금 부담 때문에 일찍 은퇴한 사실을 인정했다.
NHS의 국민연금 체계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규정들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공공 보건의료 서비스에서 의사들은 국민연금 가입 여부나 연금액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의사들은 연금으로 무조건 급여의 14.5%를 부어야 하며 종신연금은 105만5000파운드 (약 15억8000만 원) 이하로 제한돼 있다. 매년 ‘필요경비를 뺀 총소득’이 15만파운드(약 2억2000만 원) 이상이면 세금공제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의사들 소득세가 40~45%에 거의 육박하니 결국 이들이 NHS를 먹여 살린 셈이다.
영국의 이른바 ‘진보적 과세제도’가 의료진 부족 사태의 원인이라는 점에 모든 관계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보수당의 테레사 메이와 보리스 존슨 총리 때 매트 핸콕 복지장관(2018~2021)은 “몇 년 전 수정된 과세제도로 야기된 의도치 않은 결과”임을 고백했다. NHS 관계자 역시 “정책이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꼭 필요한 일을 할 노련한 의사들에게 가혹한 세금부담이었다”고 말했다. 이 문제를 잘 알면서 방치한 정치인들을 향한 비판도 높다. ‘표’를 의식하며 아무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의사들이 속한 ‘고소득자’ 증세가 환자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의사 감소, 환자들은 아플 때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없고 수술을 받으려면 훨씬 더 오래 기다리게 됐다. 소형 병원들이 문을 닫았으며 대규모 영리 병원들은 오히려 혜택을 봤다. 2018년 폐업한 외과 병원의 5분의1이 더 큰 규모의 병원에 합병됐다. 병원 통합은 환자 유치가 가능한 인구 고밀도 지역에서 이뤄지기 마련이므로 시골 지역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진료를 받기 위해 더 먼 이동거리와 고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의사들의 ‘소명 의식’까지 갉아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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