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54] 모두가 행복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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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2-28 06:30:09

변태섭은 수련회 마지막 날 늦은 시각에 나타났다. 연수원 마당에 모닥불이 활활 타오를 때였다. 수련회 내내 변태섭이 안 나타나 아쉬웠던 마당이었다. 그는 수련회가 농활과 겹쳐서 일찍 오지 못했노라 했다. 서울대 친구 네 명과 왔는데 남자 셋, 여자 하나였다. 남자들은 같은 과 동기, 여자는 법대 2년 선배라고 했다. 변태섭이 청년부 교우들에게 함께 온 선배들을 소개하는데 여자 선배는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변태섭 의지에 끌려온 여자 선배가 변태섭을 바라보는 눈빛은 그윽했다. 믿을 게 못 되는 가벼운 촉이었지만 여자 선배가 변태섭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캠프파이어 중심으로 남자 동기들은 청년부 성도 사이사이로 앉았는데 여자는 변태섭 곁을 떠나지 않았다. 수시로 변태섭 얼굴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는데 희숙은 그녀의 눈길과 미소가 신경 쓰였다. 동시에 이상한 패배감이 들었다. 패배감은 그녀가 서울대생이라는 것과, 농활을 거쳐 변태섭과 부산까지 몇 날 며칠 동행했다는 사실에 기인했다. 불안한 패배감은 마치 본처를 바라보는 첩의 느낌처럼 묘한 상실감을 동반했다. 알고 보면 밑도 끝도 없는 질투심이었다. 싸움에선 -정신적이든 물리적이든- 이겨야 의미가 있지 지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패자의 넋두리엔 ‘정신승리’만 남아 있다는 것을 희숙은 초라한 대입 성적표를 받았을 때 깨달았다.

희숙의 마음이 불 꺼진 장작처럼 씁쓸한 걸 알았을까. 수련회 모닥불 피날레가 끝나고 모두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변태섭이 희숙을 불렀다. 변태섭의 목소리는 다정했고 장작의 여열처럼 따뜻했다. 여자 선배를 상상함으로써 희숙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찰나였다.

“희숙인 하나님이 사랑하는 귀한 보배니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남은 시간 집중하면 돼.”

꿋꿋, 씩씩, 당당. 모두 좌절하지 않으려고 붙잡았던 단어였다. 하지만 수없이 무너지고 박살 났던 순간을 버티게 한 건, 잘될 거라는 희망보다 버려지지 않을 거란 낙관이었다. 상투적으로 던졌던 말, 특별한 감흥 없이 들었던 말, ‘하나님이 사랑하는 귀한 보배’는 변태섭 입을 통해서야 진심이 됐다. 희숙은 목이 메어 고개만 끄덕였다. 느닷없이 여자 선배랑 무슨 관계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건 정말이지 주제넘은 질문일 게 뻔했다. 변태섭은 고개 숙인 희숙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지금도 이렇게 예쁜데 대학 가면 얼마나 더 예쁠까. 희숙은 변태섭의 말이 사랑 고백처럼 느껴졌다. 희숙을 지탱하는 마지막 힘이 고작 교회 오빠 입에서 나왔다는 게 신기했다.

진짜 묻고 싶었던 말은 아까 그 여자 선배랑 무슨 사이예요? 였는데 희숙의 질문은 엉뚱하게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균등하게 배분되는 세상이 올지 물었다. 변태섭은 꺼져 가는 모닥불 앞에서 고3 여학생의 진지한 질문에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가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지!”

변태섭이 만들자는 행복한 세상에 대해 더 듣고 싶었는데 여자 선배가 변태섭을 불렀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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