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속 중증외상센터 의사 양재원이 맡은 외과가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한동안 화제가 됐다. 그러나 드라마와 현실은 너무도 다르다. 응급실 문턱을 넘은 환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밤낮 없이 수술실을 지키는 이들이 정작 자신들의 존재 지속 여부를 걱정해야 하는 아이러니. 지금 대한민국 대장항문외과가 직면한 현실이다.
대한대장항문학회는 ‘붕괴 초읽기’라는 표현까지 써 가며 외과 필수 의료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경고하고 있다. 수치는 이 위기의 실체를 분명히 보여준다. 전국 18개 병원, 약 3만4000명에 달하는 응급수술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급성 복증 수술의 75%는 대장항문외과 의사들이 감당하고 있었다. 그중 80% 이상은 야간에 긴급히 시행된 수술이었다.
이런 상황만 봐도 대장항문외과가 얼마나 많은 응급 중증 수술을 맡고 있으며 노동 강도 또한 높은지를 알 수 있다. 고강도 업무 환경과 낮은 보상 체계로 대장항문외과를 지원하는 젊은 의사들은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대장항문외과를 선택하는 신입 전임의(펠로우)는 3년 만에 절반 이하로 줄었다. 2022년 45명·2023년 35명에서 2024년에는 21명으로 반토막 났다.
양승윤 세브란스병원 교수는 “이대로라면 2030년에는 지원자가 거의 없을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면서 “지금도 전공의들이 떠나고 남은 인력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고 했다.
국내에서 이뤄지는 야간 응급 수술의 절반가량은 충수염(맹장염)으로 인한 충수 절제술이다. 충수염은 유병률이 높기에 과소 평가될 수 있으나 충수 절제 시기를 놓치면 복막염으로 목숨도 잃을 수 있다. 급성 충수염은 진행 정도에 따라 중증도가 천차만별이다.
대장항문외과 전문의들은 충수염 수술 하나에도 환자의 생사가 갈릴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밤이든 새벽이든 수술실 불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술 수가·과도한 업무·점점 줄어드는 동료들뿐이다.
정부는 지금껏 ‘필수 의료 강화’를 반복적으로 언급해 왔다. 그러나 구체적 방안은 여전히 추상적이고 현장의 절박함과는 거리가 있다. 의료진이 떠나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무너진 노동과 보상의 균형·감당하기 어려운 의료 분쟁의 리스크·소외된 전문 과목에 대한 정책적 무관심…. 이 모든 것이 누적된 결과다.
이제는 단순한 유인책이나 일시적인 수가 조정이 아니라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대장항문외과뿐 아니라 외과 전체가 필수 의료라는 인식 아래 지속 가능한 인력 구조를 만들기 위한 장기적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야간 수술과 응급 대응에 대한 명확한 보상 체계·전공의 지원 유인 확대·의료분쟁 리스크 분담 장치·응급수술 전담 인력 확보를 위한 정책적 로드맵이 그 시작이다.
환자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응급수술은 내일로 미룰 수 없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다. 정책의 우선순위를 바꿔야 할 시간이다. 생명을 살리는 필수 의료를 계속할 수 있게 정부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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