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의 만사만감(萬事萬感)] 호모 사피엔스를 구원할 최후의 무기는 무엇일까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연재기획

최문형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1-31 06:30:50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Blank Slate)’에는 인간의 뇌 속에서 벌어지는 충동이 나열되어 있다. 한번 들여다 보자. 경멸·분노·혐오 같은 타인 비난 감정은 사기꾼을 처벌하는 작용을 하고, 감사·고양의 감정, 도덕적 경외, 감동 등의 타인 칭찬 감정은 이타주의자를 보상하는 기능을 한다. 동정·공감·연민 같은 타인 고통 감정은 어려운 처지의 수혜자를 돕는 기능을 하고, 죄의식·수치·당혹 등의 자의식적 감정은 남을 속이지 않게 하거나 속인 결과를 바로잡는 기능을 한다.

이처럼 우리의 뇌 속에는 스무 가지 색깔의 크레파스처럼 다양한 감정들이 있다. 각각의 감정들은 노랑 계열·빨강 계열·파랑 계열 식으로 서로 모여 있기도 하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가장 필요한 색을 명도와 채도에 따라 적절하게 꺼내 쓰는 것처럼, 우리도 판단에 따라 누구를 응징하거나 상을 주거나 누군가를 돕거나 무엇을 바로잡는 데 이 감정을 꺼내 든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복잡다단한 길을 헤쳐 가는 것이다. 길 위에서 우리는 병들거나 다친 이를 돌보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를 위로하고 어떤 때는 낯선 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기도 한다. 꽤 많은 사람들이 위기에 빠진 사람을 돕다가 이름 없이 사라진다. 종종 자신의 선행이 세상에 알려지기도 하는데, 그때 사람들의 대답은 무덤덤하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하거나 ‘누구든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한다. 이는 그의 선행이 아주 즉각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반사적으로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인들도 발끈할 때가 있다. 위선은 참지 못한다. 또 충분한 자격 조건을 갖추지 못한 위인이 높은 지위에 올라갈 때 그를 어떻게든 끌어내릴 준비도 한다. 고공행진하는 사람 또한 이러한 위험을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겸손이라는 방패를 준비한다. 그저 운이 좋아서 그런 지위에 올랐다든가, 줄을 잘 섰을 뿐이라든가 혹은 누구누구 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해마다 연기상을 수상하는 배우들은 현명한 소감을 말한다. 창조주 신부터 시작하여 부모님·감독·스태프·애인에 이르기까지 솜털처럼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 인사를 한다. 꼼꼼한 배우들은 아예 리스트를 적은 종이까지 들고 나온다. 혹시라도 누군가를 빠뜨리지 않을까 염려해서다. 높이 오른 사람은 누가 되었든 그런 배려와 겸손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평등주의자’의 무기에 찔려 치명적 부상을 입고 자리에서 끌어내려질 수 있다. 평등주의자들은 농담·비웃음·혹평·풍자를 재치라는 활시위에 걸어 상대에게 날린다. 이 무기는 건방지고 야심만만한 사람을 단번에 혹은 천천히 해치울 수 있다. 타인의 시샘과 경멸은 행운을 소유한 자에게 치명적인 두려움이다.

사람들이 협동과 공격만 즐기는 게 아니다. 정의를 구현하는 데도 발 벗고 나선다. 이것 또한 인간의 본능적 쾌락이다. 무임승차자와 범죄자들처럼 협동이라곤 하지 않는 인간을 처벌하려 들고 무책임한 부자나 권력자처럼 자신의 지위에 걸맞은 기여를 하지 않는 이들도 쓰러뜨리려 한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어떤 식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있을까.

횡단보도에 초록불이 들어왔는데 스쳐 지나가는 운전자를 가로막고 비난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 범죄 현장에서 격투를 벌이기도 한다. 자신에게 손해일 수 있거나 자신과 무관할 수 있는 이런 일에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그냥’ 뛰어든다. 이러한 이타적 처벌의 집행은 고통·분노·혐오를 통해 활성화되는 뇌 중추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이러한 정의 구현 행위는 사회에 큰 질서를 세워 준다.

사람들은 정의를 세우는 행위가 나와 친족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심사숙고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 상황에서 합리적 계산을 하지 않는다. 이 진정한 이타성은 부족의 공공 이익을 추구하는 생물학적 본능에 토대를 둔다. 선사시대에 이타적 집단이 이기적 개인들의 집단보다 우세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다.

우리는 예측불가능하고 위협적인 세상에서 복잡한 충동을 헤치고 최선을 다해 전진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우리의 평범해 보이는 이타주의적 본능 너머에는 명예심이 자리한다. 명예심은 생득적 공감 능력과 협동의 본능에서 탄생한 감정으로서 우리 종족, 호모 사피엔스를 구원해 줄 최후의 무기가 될 수 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엄청난 재화를 들이대며 우리가 가진 이타성과 공공성과 명예와 맞바꾸자고 할 때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우리 종은 ‘호모 오이코노미쿠스(Homo Oeconomicus)’가 아니다. 즉 ‘경제적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명예심을 가지고 협동을 통해 정의를 구현하려 고군분투하는 실존적 이타주의자이다.

최문형 필진페이지 +

후원하기

정기 후원
일반 후원
무통장입금: 하나은행 158-910019-39504 스카이데일리
시대의 금기를 깨는 정론지 스카이데일리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만들어집니다.

정기 후원 독자께는
스카이데일리가 주최하는 각종 행사에
초대, 할인 혜택 등을 드립니다.

매월 5만 원 이상 정기 후원 독자께는
스카이데일리 신문과
스카이데일리가 발행하는 최신 단행본을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