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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본다. 머리에 핵을 이고 살며 밖으로는 자국 중심주의의 물결이 살벌한 칼춤을 추는 가운데 국가안보와 경제에 집중해야 할 이때 난장판이 된 정치 상황에 모두가 넋을 놓고 있지 않은가.
북한보다도 가난했던 시절을 이기고 전 세계 국력 순위 6위의 부강한 나라를 만든 우리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이 혼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를 살피다 보면 그 꼭짓점에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좌파 세력의 득세와 한반도와 세계의 안위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는 북한 핵 개발의 출발점이 김대중 정권임을 고발한 전 국정원 직원의 기록… 이 절박한 시점에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유
나의 국정원 체험을 본격적으로 얘기하기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좀 설명하려 한다. 사실 이런 내용을 꼭 넣어야 하는지 망설여졌지만 넣기로 했다. 왜냐하면 “전직 국정원 출신이 왜 외국으로 망명까지 하면서 김대중 씨의 반역 행위를 고발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어느 정도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이 지나 나의 딸과 아들이 못난 아비를 이해할 나이가 되면(영영 그렇게 안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한 번쯤 읽어 주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극히 사소한 신상잡설을 늘어놓는 데 대해 먼저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내 고향은 경남 밀양의 작은 시골 동네
1964년 한가위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나는 경상남도 밀양의 작은 시골 동네에서 태어났다. 자손이 귀한 집도 아닌 데다 한창 바쁠 때 세상에 나온 죄로 나의 이 세상 데뷔는 그리 떠들썩한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주위의 정황으로 볼 때 나의 탄생은 그저 없는 살림에 ‘먹는 입(식구) 하나 는 것’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의 고향은 밀양시 상남면 평촌리 대흥동이라는 곳이다. 대흥동은 일본식 명칭이다. 아마 우리 동네가 일제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1930년대 초, 일제는 대륙 침략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른바 산미증식(産米增殖) 계획이라는 것을 시행하고 전국의 황무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했다. 낙동강의 한 지류였던 남천강(밀양강)에도 제방을 쌓고 농지를 만들었다. 이 제방 공사에 동원되었던 인부들이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 동네는 남천강의 강둑을 따라 길게 자리잡고 있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강둑은 높이가 10여m에 이르는 데다 길이는 족히 수십km가 넘는다. 그래서 내 기억 속의 고향 마을 풍경은 이수복 시인의 ‘봄비’ 이미지로 담겨 있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 지껄이것다/ (…)”
어린 시절 나는 온전히 남천강 가에서 자랐다. 남천강은 나의 놀이터요 젖줄이었다. 해마다 봄철이면 강가 하천부지에서 노고지리 사냥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늦봄이 되면 밀밭 고랑에서 전우 놀이를 하며 뛰어다녔다. 강가 모래사장에서는 빠꾸미를 잡고, 강둑에서는 소똥벌레를 잡았다.
여름철이면 하천부지에 소 먹이러 가서 동네 아이들과 축구를 하고, 목이 마르면 강 중간으로 헤엄쳐 들어가 강물을 마시곤 했다. 마른 모래톱 사이에서는 새하얀 물새알을 줍고, 젖은 모래톱에서는 노란 재첩 조개를 잡았다. 나는 지금도 나의 피 속에는 남천강 물이 흐른다고 믿는다.
내 고향 밀양은 충절의 고장
내 고향 밀양은 충절의 고장이다. 조선조 사림의 태두인 점필제(佔畢齌) 김종직(金宗直) 선생이 난 곳이다. 점필재의 아버지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慈)는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의 학풍을 이어받은 사람이다.
목은 이색‧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문신의 충절을 상징하는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조선 개국에 반대하던 야은이 금오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 김숙자가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강호 김숙자가 처가인 밀양으로 이사해서 점필재를 낳았다”고 한다.
점필재가 태어났을 때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던 시냇물이 단물로 변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도 그 시내를 감천(甘川) 또는 감내라고 부른다.
‘소밀양(小密陽)’? ‘소안동(笑安東)’이다!
사림의 본거지이다 보니 밀양에는 아직도 유교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남아 있다. 조선 후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한창일 무렵 안동 사람들이 밀양을 낮추어 ‘소밀양(小密陽)’이라고 비하한 데 대해 ‘소안동(笑安東)’이라고 응수해 줬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올 정도이다. 구한말, 경부선과 경전선(慶全線‧경부선 삼랑진역과 호남선 광주 송정역을 잇는 간선철도) 분기점이 밀양이 아니라 삼랑진으로 정해진 것도 유림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안의 재실 이름은 탁삼재(卓三齋)이다. 풀이하면 ‘충(忠)‧효(孝)‧열(烈) 세 가지에 뛰어났다’는 말이다. 우리 집안의 시조는 임진왜란이 나자 90세 된 노모를 등에 업고 의병에 나선 분이라고 한다. 그의 두 아들은 병자호란이 나자 의병에 참가해 경기도 광주의 쌍령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그 부인들은 남편들의 주검을 장례 치르고 난 뒤 자결하여 절조를 지켰다고 한다. 이렇게 2대에 걸친 충‧효‧열의 정신이 우리 집안의 재실 이름에 남게 됐다.
밀양에는 또한 ‘정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버렸다’는 아랑의 전설이 살아 있다. 아랑의 전설은 해마다 여름이면 납량특집극으로 TV에서 단골로 이용되는 소재이다. 요즘도 아랑을 기념하여 매년 5월 초순이면 며칠간 아랑제가 성대하게 열린다. 아랑제는 남원의 춘향제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방 문화축제 행사 중의 하나로 꼽힌다.
충절의 고장에서 의열을 배우다
밀양은 또한 의열(義烈)의 고장으로, 사명대사(四溟大師)를 배출한 곳이다. 밀양의 재약산 기슭에 있는 천년 고찰 표충사(表忠寺)에는 그 이름에서부터 사명대사의 얼이 서려 있다. 사명대사의 생가 부근에 있는 사명대사 비(碑)는 요즘도 ‘국난(國難)이 있을 때면 땀을 흘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밀양은 또한 의열단(義烈團)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의열단은 권총 한 자루로 일제에 저항했던 항일결사 단체였다. 1919년 4월 의열단이 만주에서 최초 결성되었을 때, 의열단 단장(義伯)이었던 약산 김원봉 선생을 비롯해 열세 명의 단원 가운데 일곱 명이 밀양 사람이었다고 한다.
의열단은 밀양경찰서 폭파사건‧종로경찰서 폭파사건 등 1920년대의 주요 국내외 의거를 주도했다. 의열단 단원들은 후에 광복군을 조직하는 모태가 되었다. 김원봉과 의열단은 그 후 일제 말 중국에서 광복군으로 진화해 나갔다.
‘햇볕이 잘 드는 땅’ 밀양
여담이지만, 몇 해 전 ‘밀양’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큰 인기를 얻은 적이 있다. 프랑스의 칸 영화제에 출품해 여우주연상 등을 타기도 했다고 한다. 그 영화의 선전 포스터에 밀양을 ‘시크릿 선샤인(Secret Sunshine)’이라고 번역해 놓은 걸 본 적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무지에서 비롯된 오역이거나 아니면 햇볕론자들이 억지로 끌어다 붙인 오역인 것 같다.
밀양은 한자어로 ‘빽빽할 밀(密)’에 ‘볕 양(陽)’ 자를 쓴다. 굳이 풀이하자면 ‘햇볕이 잘 드는 땅’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무리 늘려서 해석하려고 해도 무슨 ‘비밀스러운 햇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솔직히 말해서 필자는 ‘햇볕’이란 용어에 조금 병적인 알레르기 반응이 있어서 그런지, 이런 식의 오역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낀다.
실제로 밀양은 소백산맥 줄기 남쪽에 있는 분지이기 때문에 햇볕이 잘 드는 곳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요즘도 가끔 낮 최고기온이 가장 높은 곳으로 밀양이 뉴스에 나오곤 한다. 달기로 소문난 얼음골 사과가 바로 밀양산이다. 상식적인 얘기지만, 과일의 당도는 일조량이 결정한다.
이 기회에 밀양의 명칭에 대해 뱀 발(蛇足)을 좀 더 그려 붙이자면 다음과 같다. 밀양의 고유한 우리말 명칭은 ‘미리벌’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이를 이두식으로 표기해 ‘추화군(推火郡)’이라고 불렀는데 ‘미리벌’을 한자로 음역하면 ‘밀(미리) 추(推)’에 ‘불(벌) 화(火)’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고려시대에 ‘밀주(密州)’ 또는‘밀양’이라는 명칭으로 바뀐 후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https://niswhistleblower.tistory.com/)를 방문하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김기삼
△서울대 법대 졸업
△펜 스테이트 디킨슨 법대 비교법학(LLM) 석사 졸업
△국가정보원 8년 근무
△2003년 미국 망명
△2011년 망명 확정
△(현) 미국 뉴욕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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