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55] 보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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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3-04 06:30:18

희숙은 기숙사 짐 정리를 끝내고 교내 공중전화 부스로 가 변태섭 이모 집에 전화했다. 누구세요? 쉰 목소리였다. 부산 억양이 있는 걸로 봐서 이모인 듯했다. 변태섭 오빠 고향 동생 윤희숙이라고 합니다. 내는 변태섭이 이몬데, 변태섭이 외출하고 없으니 저녁 10시쯤 다시 전화하세요, 메모 전달할 테니. 희숙은 밤 10시가 되길 기다렸다. 아직 기숙사는 난방이 되긴 해도 입실이 덜 완료된 상황이라 썰렁한 기운이 돌았다. 3인실 방에 희숙 말고 또 한 명의 짐이 풀리지 않은 채 침대 위에 놓여 있었고, 나머지 침대는 비어 있었다.

서울에서 사고무친인 희숙이 연락할 수 있는 곳은 교회 권사님의 딸과 변태섭뿐이었다. 다행히 기숙사에서 동향 선배를 만났다. 10시까지 기다렸다 변태섭에게 다시 전화했다. 이모님이 받았는데 잠시 기다리라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막상 변태섭이 받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변태섭을 부르는 소리가 수화기 건너로 들려왔다. 그 몇 초 사이, 희숙은 자신의 요동치는 심장 소릴 들었다. 일생일대에 그런 떨림음은 처음이었다. 전교생이 보는 강단 위에 올라 스피치했던 긴장도 이보다는 덜했다. 말로만 듣던 심장 터지는 느낌은 이런 거였다.

“여보세요. 희숙이구나”

변태섭의 낮은 중저음이 심장 박동 속도를 늦춰 주었다. 네, 올라왔어요. 기숙사 짐 풀고 지금 전화하는 거예요. 변태섭은 연락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변태섭은 잠시 침묵하다 내일 시간이 되느냐 물었다. 희숙은 침묵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했다. 만나는 게 부담스러운 건 아닌지, 여자친구가 있는 건 아닌지. 선뜻 대답 못 하자 변태섭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만나는 거, 싫어? 희숙은 전광석화보다 빠르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만나요. 처음 갖는 감정이란 건 그토록 소중하고 고결했다. 여자친구가 있든, 부담스럽든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비참과 불행도 감당할 만큼 순수한 감정이었다.

변태섭이 운동권에 투신한 계기는 사소한 마찰과 퍼포먼스·기대와 허탈이 발단이었다. 사소한 마찰은 학교 주변에 늘 있었다. 사복 경찰은 수배 학생과 비슷한 옷차림만 해도 가방을 뒤졌다. 주로 비운동권 학생들과의 마찰이었고 학생들은 지나친 검색에 반발했다. 중간고사 후 시위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변태섭은 사범대 식당에서 점심을 마친 뒤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앞에서 시위가 벌어져 발길을 다시 사범대 쪽으로 돌렸다. 시위대가 사범대 쪽으로 달아나자 경찰이 흩어진 시위 학생들을 잡으러 쫓아갔다.

변태섭은 몰려온 시위대와 함께 엉겁결에 화장실 쪽으로 피신했다. 화장실은 이미 피신해 온 학생들로 가득했다. 화장실 밖에서 경찰이 문을 부술 기세로 두드렸다. 문 열어, 새끼들아! 너희 잡히면 다 죽었어! 하는 수 없이 화장실에 갇힌 학생들은 화장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고 변태섭도 그들을 따라 화장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뛰어내리면서 발이 접질렸는지 통증이 느껴졌다. 절뚝거리며 뜀박질하고 있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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