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13] 심장이 뛰지 않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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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혈된 눈, 푸릇한 가시 하나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6-19 06:30:10

“네 인생이잖니.”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닌데 어머니는 하운에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네가 알아서 해.” 그뿐이었다. 동우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도 탐탁지 않아 했지만 애써 반대하진 않았다. “말리지 않았다고 나중에 원망은 하지 마라.” 어머니는 축복의 말 대신 모질게 덧붙였다. 만약 하운이 이혼하겠다고 하면 어머니는 싸늘하게 말할 것이다. “벼랑 끝인 줄 알았으면 돌아서야지.”

어머니의 말은 늘 옳았다. 하지만 그녀의 직설이 하운을 보호하지는 못했다. 하운은 결혼을 후회할 때마다 어머니를 떠올랐다. “거 봐라, 내가 뭐랬니?” 하는 말보다 더 무서운 건 없었다.

자신의 인생을 연민하는 대신 모성의 본능으로 단 한 순간만이라도 세상 밖으로 도망가려 딸을 품어 보려 했다면 하운의 삶은 달라졌을까.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곳이 엄마의 품이라는 말은 하운이 이해할 수 없는 최초의 문장이자 최후의 문장이 될 터였다. 지칠 때는 모정이 그립다가도 막상 한 공간 안에 있으면 날이 퍼런 칼날 위에 맨발로 서 있는 것 같았다.

바깥으로 돌기만 했던 아버지의 삶이 어머니의 그것보다 더 가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고, 하운은 아버지를 이해했다. 명절 때만 마지못해 어머니가 사는 오빠 집을 찾아갔고, 살갑지 않은 걸 서운해 하면서도 어머니 역시 하운의 생일이 아니면 먼저 전화하는 일도,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먹지도 못 할 미역국을 한 냄비 끓여 놓고는 한 끼도 같이 먹지 않고 한 시간 거리 아들네 집으로 돌아갔다.

하운은 빨간 고무장갑을 양손에 끼고 시큼하게 쉬어 버린 미역국을 냄비째 개수대에 쏟아 버렸다. 거무스름해진 미역 줄기와 하얗게 엉겨 붙은 고기 기름이 엉겨 개수대 물이 잘 빠지지 않았다. 쉰내가 역해서 쓸데없이 헛구역질이 났다. 미끌미끌한 건더기를 건져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는 동안 호흡을 멈추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락스를 풀어 수세미로 개수대를 박박 닦아 냈다. 수도꼭지를 세게 틀어 놓고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빗줄기가 거세게 들이쳤다.

침대 시트를 벗겨 내고 청소기를 밀었다. 그래도 남아 있는 비릿한 냄새를 지우려고 섬유 유연제로 헹궈 구석구석 걸레질했다. 세탁기에 남아 있던 빨래를 모아 세탁기를 돌렸다. 청소를 모두 마치고 집안을 돌아봤을 때, 위장은 참을 수 없는 허기로 꾸르륵거렸다. 뱃속에 죽은 아이를 품고서도 참을 수 없는 식욕을 느끼는 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희극적이었다. 전자레인지로 덥힌 냉동 밥을 양푼에 쏟아부었다. 김치와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어 비빈 뒤 싹싹 먹어 치웠다. 밥알 한 톨 남지 않은 빈 그릇을 보는 순간 그녀는 울고 싶었다. 감정은 이래서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